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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의 수필향기] <맹난자 6 - 빈 배에 가득한 달빛 >

수필가 김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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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배에 가득한 달빛

 

맹난자

 

    우리집 작은 방 벽면에 수묵화 한 점이 걸려 있다. 사방이 겨우 한 뼘 남짓한 소품인데 제목은 <귀우도歸雨圖>이다. 조선조 중기 이정李楨이란 사람이 그린 그림의 영인본이다. 

 

    오른쪽 앞면에는 수초가 물살 위에 떠 있고 어깨에 도롱이를 두른 노인이 노를 비스듬하게 쥐고 있다. 간단하면서도 격조있는 그림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는 흐르는 강물과 그 위의 배 한 척이면 그것이 실경實景이 되었건 그림이 되었건 간에 무조건 좋아하는 버릇이 생겼다. 

 

    잔잔히 흐르는 물살. 그 위에 떠가는 시간. 

그러한 강물과 마주하게 되면 이내 '서사정逝斯亭'이 떠오르고 '가는 자 이와 같은가'했다는 공자의 그 말이 생각나곤 했다. 나 또한 발길이 막히면 강가에 나가 '가는 자 이와 같은가'를 되뇌어 보기 몇 번이었는지 모른다. 

 

    강물은 참으로 사람을 유정有情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어느 날은 숨죽인 강물의 울음소리가 내 안에서도 일어나는 것이었다. 
 

    얼큰하게 술이 오르면 아버지께서 자주 부르시곤 했던 노래. 아직도 귓전에 맴도는 젖은 목소리.    

    "이즈러진 조가악달. 가앙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이런 강물 위에 달빛마저 실린다면 가을 풍경으로서는 나무랄 데가 더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고 보면 강물과 배와 달빛은 내게 우연히 각인된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이던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옷가지를 내다 태우고 돌아온 날 밤, 동생들 모르게 실컷 울어보려고 광에 들어갔는데 거기에도 달빛은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왔다. 

 

    그때 달빛만 있으면 어디에서건 세상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슬프면서도 왜인지 그다지 서럽지가 않았다. 흰 눈이 더러운 흙을 감싸듯, 달빛은 지상의 온갖 것들을 순화시키는 따스한 손길을 갖고 있는 듯싶었다. 

 

    달빛은 또 감성의 밝기를, 그리고 그 명암의 농도를 조종하는 장치도 갖고 있는 듯했다.   

빈 배에 가득한 달빛

 

16년 전쯤 되나 보다, 교단에서 두시杜詩를 가르칠 때였다.  마침 가을이어서 <추흥秋興> 여덟 수 가운데서 나는 첫 번째의 시를 골랐다. 

 

              또 국화는 피어 다시 눈물 지우고

              배는 매인 채라

              언제 고향에 돌아가랴.

 

    고향으로 떠나지 못하고 있는 한 척의 작은 배.   그 '고주일계孤舟一繫'는 두보 자신일 것이다. 그는 오랜 표랑 끝에 무산巫山에 들어가 은거하고 있었는데 벌써 폐병과 소갈증으로 신병이 깊은 후였다. 고향으로 가는 도중 배 안에서 죽으니 나이 쉰아홉. 

 

    이 시가 그대로 내 가슴속에 들어와, 어쩌면 내가 그 실경實景 속의 주인공이나 된 것 같았다. 

 

    아니 내 경험 속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은 들어 있었다. 서울이 집인데도 명절날 집에 가지 못하고 자취방에서 멍하니 혼자 있을 때, 그때도 만월은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왔다.          

 

   빈 방, 그리고 달빛.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때 가슴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누르기 어려운 충일充溢. 아, 어떻게 말로 다 풀어낼 수 있을까?  빈 배와 달빛과 그 허기를.  그래서 아마 그때부터 달빛은 나의 원형이 되었고, 빈 배는 그대로 나의 실존을 뜻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저 수묵화 속에서 노옹을 빼버리고 아예 빈 배로 놔두고 싶다. 그 위에 달빛만 가득하다면 거기에 무얼 더 보태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을 때, 나는 버리는 것부터 배웠다. 그 때문인지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간다는 토끼처럼 도중에서 아예 목적을 버리고 마는 버릇. 투망을 하러 바다에 나갔다가 또 '어획' 그 자체를 버리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돌아오는 배에는 달빛만이 가득하거니, 달빛만 가득하다면 그것으로 좋았다. 무형無形의 그 달빛은 내게 있어 충분히 의미 있는 그 이상의 무엇이 되었으며, 언제인가부터 나도 제 혼자서 차오르는 달처럼 내 안에서 만월을 이룩하고 싶었다. 

 

    저 무욕대비無慾大悲의 만월을. 

 

* 서사정逝斯亭 : 화담 서경덕 선생이 즐겨 머물던 개성 동문 밖 화담리花潭里에 있는 정자. 

* 무욕대비의 만월(보름달) : 고요하고 숭고한 정신적 경지로,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타인의 고통을 감싸 안는 온전한 사랑이 가득 찬 상태.

그림  : 김영희

   [심향 단상]

 

    맹선생님께서는 작은 방 벽면에 걸려 있는 '흐르는 강물과 그 위의 배 한 척'이 떠있는 수묵화 <귀우도> 그림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동생들 모르게 실컷 울고 싶어 들어간 '광'에서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을 마주했고, 그때 그 달빛만 있으면 세상은 모두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슬픈데 그다지 서럽지 않았던 것은, 쏟아지는 달빛이 하도 밝아 텅 빈 공간에 가득 찬 달빛이 등을 켠 듯 눈부시게 밝혀 주었으니 마치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는 듯, 어둠 속에서 앞길을 안내해주는 등불 같은 빛이 비춰주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때 그 달빛은 선생님의 슬픔을 따듯하게 감싸주려는 어디에선 가 보내준 따뜻한 손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고경희 시인의 시 '상한 영혼을 위하여'에서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고통 속에 빠져계셨던 선생님은 동생들 모르게 숨어서 울음을 풀고 싶어 '광'으로 들어갔지만 그 '광' 안에는 밝고 따스한 달빛이 가득 비추고 있었으니, 그 달빛이 어느 하늘 아래서 누군가 내민 손 하나가 아니었을지. 

 

    같은 서울 하늘에 살면서도 명절날 집에 가지 못하고 자취방에서 멍하니 혼자 있을 때도 만월은 눈부시게 자취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빈 방에 가득한 달빛!

 

    그 슬픔의 허기를 달빛이 가득 품어주었고, 그 후 달빛은 선생님의 원형이 되고 빈 배는 선생님의 실존을 뜻하게 됩니다. 어디에서도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자신을 위해 스스로 차오르는 달이 되어 만월을 이룩하고 싶으셨던 선생님!

 

    세월은 많이 흐르고 이제 그 만월이 되어 세상을 향해 밝게 빛을 비추고 계신 분. 

 

    선생님께서는 제가 힘든 시기에 환한 달빛으로 오셔서 제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셨습니다. 기적처럼 전혀 모르는 분에 의해, 어느 하늘 아래에서 마주 잡을 손이 제게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제 2026년 3월 3일(음력 1월 15일)은 정월대보름날이었습니다.  정월대보름은 '가장 큰 보름'이라는 뜻으로 오곡밥과 나물,부럼과 귀밝이술을 먹고 달맞이를 하며 한 해의 건강과 풍요를 비는 명절로, 전통놀이로는 '달집태우기'와 '쥐불놀이', '지신밟기', '줄다리기'도 합니다. 

   
 둥근 보름달은 소원성취를 의미하여 올해는 '붉은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습니다. 

 그제 정월대보름달은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이후 36년만의 개기월식으로, 태양과 지구와 달이 일직선상에 위치하면서 달이 지구 그림자에 가려지는 현상으로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붉은 빛이 굴절되어 달에 도달함으로써 달이 붉게 빛나 '붉은 달(블러드 문)'이 된다고 하여, 밤 8시부터 밤 9시 정도까지 그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정월대보름달은 8시 30분 경에 달 전체가 붉게 보였고 그 후 하늘에 구름이 가득 덮여서 잘 보이지 않다가 점차 밝은 빛을 되찾았습니다. 

 

   그제 보름달을 보며 소원 많이 비셨는지요? 

   정월대보름달의 붉은 기운을 받아 2026년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김영희 수필가 

수필가 서예가  캘리그래피 시서화 

웃음행복코치 레크리에이션지도자 명상가 요가 생활체조

 

수필과비평 수필 신인상 수상

신협-여성조선 '내 인생의 어부바' 공모전 당선 - 공저 < 내 인생의 어부바>

한용운문학상 수필 중견부문 수상 - 공저 <불의 시詩 님의 침묵>

한국문학상 수필 최우수상 수상 - 공저 <김동리 각문刻文>

한글서예 공모전 입선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필과비평 작가회의회원                                     

코리안드림문학 편집위원

코리아아트뉴스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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