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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56] 김강호의 “한지문을 읽다”

시인 김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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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에 잠긴 서사를 서정의 언어로 복원”

한지 문을 읽다

 

김강호

  

넌 이미 나무이면서 포근한 집이었다

온몸을 짓찧어서 한 겹씩 떠낸 살로

빗살문 팽팽히 당겨 시린 별빛 우려냈다

 

오래도록 젖어들던 처연한 흐느낌을

문양으로 새겨 두고 누렇게 빛이 바랜

벙어리 일대기 담은 가슴 아린 노래였다

 

깊은 밤 갈기 세운 드센 물결 거슬러

암흑기 헤엄쳐온 빗살무늬 속에는

칼보다 푸른 목숨이 숨죽이고 있었다

한지 문을 읽다_ 김강호 

이 시조는 한지 문을 단순한 사물로 보지 않고, 존재의 기억과 생의 고통을 간직한 유기체로 호명하는 데서 출발하기로 했다. 나는 이 작품에서 한지를 읽는다기 보다, 그것이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귀 기울이는 태도를 취했다.

 

첫 수에서 넌 이미 나무이면서 포근한 집이었다라는 진술은 대상의 이중적 정체성을 드러낸다. 나무였던 과거와 집이 된 현재가 겹쳐지며, 존재는 이미 한 번의 생을 통과한 흔적을 품는다. 이는 단순한 재료의 변환이 아니라, 생에서 또 다른 생으로 건너가는 변이의 서사다. “온몸을 짓찧어서라는 표현은 그 변이가 폭력적 단절 위에 놓여 있음을 암시하고, “한 겹씩 떠낸 살은 희생의 층위를 시각적으로 보았다. 한지는 더 이상 종이가 아니라, 벗겨낸 생의 표피이며, 그것으로 빗살문 팽팽히 당겨진 순간, 상처는 구조가 되고 고통은 형태가 된다. 그 위에 시린 별빛우려낸다는 구절은 차가운 우주적 시간과 인간의 체온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감각의 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수에서  한지의 침묵을 문양이라는 기호로 읽었다. “오래도록 젖어들던 처연한 흐느낌은 물리적 습기가 아니라 감정의 스며듦이며, 그것이 문양으로 새겨진다는 점에서 고통은 장식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그 장식은 화려함이 아니라 퇴색을 향한다. “누렇게 빛이 바랜이라는 표현은 시간의 침식을 드러내며, 기억이 낡아가는 방식까지 품는다. 여기서 한지는 벙어리 일대기를 지닌 존재다. 말할 수 없는 서사는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지니며, “가슴 아린 노래라는 역설적 명명 속에서 소리 없는 소리가 발생한다. 이 침묵의 음성을 통해, 기록되지 못한 삶들이 어떻게 사물 속에 각인되는지를 드러내고자 했다.

 

셋째 수에서는 한지의 내면을 보다 근원적인 생명성으로 끌어올렸다. “깊은 밤 갈기 세운 드센 물결은 시간의 격랑이자 역사적 암흑이며, 그 속을 헤엄쳐온존재로서의 한지는 단순한 정적 사물이 아니라 능동적 생명체로의 변모다. 특히 암흑기라는 표현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집단적 고통의 기억까지 환기하기 위함이다. 그 기억이 새겨진 빗살무늬 속에는 칼보다 푸른 목숨이 숨겨져 있다. 여기서 푸름은 생명의 긴장과 저항이며, ‘칼보다라는 비교는 그 생명이 지닌 날선 생존 의지의 강조다.

 

결국 이 시조에서 한지는 단순한 전통 소재가 아니라, 고통과 시간, 그리고 생명의 잔존을 품은 존재로 재탄생한다. 한지를 통해 사라진 것들의 목소리를 불러내고, 침묵 속에 잠긴 서사를 서정의 언어로 복원하고자 했다.

김강호 시인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시인 김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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