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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월은 왜 잔인한가 — 엘리어트가 말한 봄의 역설

임만택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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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다. 우리는 보통 이 계절을 희망으로 부른다. 꽃이 피고, 햇살이 부드러워지고, 생명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간. 그러나 한 시인은 이 계절을 정반대로 선언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T. S. Eliot의 『The Waste Land』이 던진 이 문장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멈춰 세운다.

왜 하필 4월이 잔인한가.

 

엘리어트에게 봄은 생명의 회복이 아니라, 오히려 감각의 강제적 부활이었다. 겨울은 모든 것을 덮는다. 기억도, 감정도, 욕망도 얼어붙는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상태, 그것이야말로 일종의 안식이다. 그러나 봄은 그 정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땅속에 묻혀 있던 것들을 끌어올리고, 잊고 있던 감정들을 다시 흔들어 깨운다. 시 속에서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낸다”는 구절은 단순한 자연의 묘사가 아니다. 그것은 죽어 있던 감각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의 폭력성을 말한다.

 

문제는 그때 되살아나는 것이 반드시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기억은 상처를 동반하고, 욕망은 결핍을 드러낸다. 우리는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그 삶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자각하게 된다. 그래서 봄은 희망을 주는 계절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을 더 깊은 자각으로 밀어 넣는다. 엘리어트가 보기에 잔인함이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살아난다는 것은, 다시 느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시가 쓰인 시대를 떠올리면 그 의미는 더 또렷해진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은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폐허에 가까웠다. 문명은 균열되었고, 인간은 방향을 잃었다. 그런 상황에서 찾아온 봄은 어떤 의미였을까. 자연은 다시 푸르러지지만, 인간의 내면은 여전히 황무지로 남아 있다. 이 간극, 회복과 붕괴가 동시에 존재하는 아이러니가 바로 『황무지』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다. 봄은 회복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회복되지 못한 상태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계절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감각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는 종종 무감각 속에서 버틴다. 바쁘게 살아가며 감정을 유예하고, 생각을 미뤄둔다. 그러나 어느 순간, 계절이 바뀌거나, 어떤 장면을 마주하거나, 익숙한 냄새 하나가 스쳐 지나갈 때—갑자기 오래된 기억과 감정이 되살아난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된다.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잠들어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4월은 단순히 따뜻한 계절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다시 느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엘리어트의 문장은 결국 희망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희망이란 언제나 편안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고통을 동반하며 우리를 흔들어 깨운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겨울이 더 안전할 수 있지만,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4월의 잔인함은, 역설적으로 삶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장을 이렇게 다시 읽을 수도 있다.
 

4월은 잔인하다.


그러나 그 잔인함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다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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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만택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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