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규 칼럼] 821조, 제대로 써야 국민 삶이 바뀐다
821조 원 쓴다는데… 그래서 국민 삶은 무엇이 달라집니까, 숫자만 놓고 보면 쉽게 실감하기 어려운 규모다.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으로 제시한 총지출은 올해 본예산 727조 9천억 원보다 93조 원 늘어난 820조 9천억 원이다. 증가율은 12.8%다. 대한민국 재정 역사상 처음으로 800조 원을 넘어선 예산이다. 지난해 700조 원대에 들어선 데 이어 불과 1년 만에 예산의 앞자리가 다시 바뀌었다. 총지출 증가율이 두 자릿수를 기록한 것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이후 처음이다.
이제 국민이 물어야 할 질문은 단순하다. 그래서 내 삶은 무엇이 달라지는가. 예산의 크기는 국가가 얼마나 많은 돈을 움직이는지를 보여주는 숫자다. 그러나 국가의 실력은 얼마나 많이 쓰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제대로 쓰느냐에서 드러난다. 이번 예산안의 총수입은 880조 8천억 원, 국세수입은 584조 4천억 원으로 전망됐다. 정부는 반도체 호황 등에 따른 법인세와 소득세 증가를 주요 배경으로 제시했다. 총지출 820조 9천억 원을 감안하면 통합재정수지는 59조 9천억 원 흑자로 전환된다. 관리재정수지도 GDP 대비 0.1%로 사실상 균형 수준까지 개선될 것으로 전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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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인 재정지표만 보면 상당히 안정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재정에는 언제나 두 얼굴이 있다. 하나는 오늘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돈이고, 다른 하나는 내일의 성장 기반을 만드는 돈이다. 문제는 이 둘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있다.
정부는 이번 예산에서 AI와 3대 메가프로젝트에 21조 3천억 원을 투자하고, 미래 성장엔진 확충에 62조 8천억 원을 배정했다. 청년 성장단계별 종합지원에는 43조 3천억 원을 투입하고, K자형 양극화 대응과 모두의 성장에는 117조 1천억 원을 편성했다. 방향 자체는 시대적 요구와 맞닿아 있다. AI와 반도체, 피지컬 AI, 데이터센터 등 미래산업에 투자하지 않으면 산업 전환의 속도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청년에게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제공해야 하고,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면서 지방의 성장 기반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부터가 진짜 심사다. 얼마를 투자했는가에서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가로 질문을 바꿔야 한다. AI에 21조 원을 투입했다면 AI 관련 예산이 늘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돈으로 기업의 생산성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새로운 일자리가 얼마나 만들어졌는지, 중소기업의 AI 전환이 얼마나 빨라졌는지, 연구개발 성과가 실제 산업과 매출로 얼마나 연결됐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청년정책도 마찬가지다. 청년에게 얼마를 지원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원이 끝난 뒤에도 청년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가다. 일회성 지원금보다 안정적인 일자리 하나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월세 지원보다 좋은 일자리가 있는 지역에 적정한 가격의 주택과 교통망을 함께 만드는 것이 더 지속 가능한 해법일 수 있다. 교육비를 지원하는 것만큼 교육이 실제 취업과 소득 향상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복지정책과 산업정책, 주거정책과 교통정책, 교육정책과 일자리정책을 따로 볼 것이 아니라 국민의 삶이라는 하나의 결과물로 묶어 평가해야 한다. 국민에게 중요한 것은 명목소득만이 아니다. 실제로 쓸 수 있는 돈, 즉 가처분소득이다. 월급이 올라도 월세가 오르고, 소득이 늘어도 병원비와 교육비와 식료품비가 더 빠르게 오른다면 국민이 체감하는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따라서 앞으로의 예산은 소득을 늘리는 정책과 함께 생활비를 낮추는 정책을 동시에 설계해야 한다.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소득을 높이고, 주택 공급을 확대해 주거비 부담을 낮추며, 교통망을 개선해 통근비용과 시간을 줄이고, 지역 의료체계를 효율화해 불필요한 의료비 부담을 줄이는 방식이다. 돈을 더 주는 정책과 돈이 덜 들게 만드는 정책은 다르다. 지속 가능한 재정이라면 후자의 비중을 점점 높여야 한다.
이번 예산에서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이 미래대응기금이다. 정부는 162조 3천억 원 규모의 미래대응기금을 통해 추가 세수 여력을 미래 성장과 청년·지방·교육·인재 등에 활용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여기서 사실관계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다. 162조 3천억 원 전체가 2027년에 정부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별도의 현금성 예비비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부 설명에 따르면 미래대응기금 가운데 45조 4천억 원은 청년·성장동력·지방·교육·인재 등 4대 분야에 투자하고, 12조 5천억 원은 국채 신규발행 물량을 줄이는 데 활용한다.
따라서 핵심 쟁점은 162조 원을 정부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느냐’가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반도체 호황 등으로 발생한 추가적인 세입 여력을 어떻게 미래의 성장 기반으로 전환할 것인가. 호황기에 들어온 세수를 일시적인 소비 확대에 모두 써버린다면 미래의 부담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생산성을 높이고 성장잠재력을 키우는 데 제대로 투자한다면 미래 세대가 부담해야 할 재정의 무게를 줄이는 자산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미래대응기금의 핵심은 규모가 아니라 운용 원칙과 성과 검증이다. 어디에 얼마를 투입했는지만 공개할 것이 아니라 왜 그곳에 투자했는지, 어떤 성과를 기대했는지, 실제 성과는 무엇이었는지를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이번 예산에서 정부가 제시한 또 하나의 핵심 숫자가 있다. 107조 6천억 원 규모의 지출 구조조정이다. 정부는 재량지출 38조 6천억 원과 의무지출 69조 원을 조정하고, 약 2,100개 사업을 폐지하거나 조정하는 등 역대 최대 규모의 구조조정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이 대목은 오히려 중요하다. 새로운 사업을 만드는 것보다 기존 사업을 제대로 정리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부가 100억 원을 새로 투입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관행적으로 이어져 온 사업을 폐지하는 것은 어렵다. 예산에는 이해관계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짜 재정개혁은 신규사업의 화려함보다 기존사업을 얼마나 냉정하게 평가하고 정리하느냐에서 판가름난다.
여기에 기업의 ROI, 즉 투자수익률과 비슷한 사고를 예산에도 적용할 필요가 있다. 모든 공공정책을 돈으로 환산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복지와 안전, 교육과 국방처럼 시장가격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공공가치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최소한 다음 정도는 답할 수 있어야 한다. 100억 원을 투입해서 누구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는가. 일자리는 얼마나 늘었는가. 생산성은 얼마나 높아졌는가. 국민의 부담은 얼마나 줄었는가.
그 효과는 일회성인가, 아니면 5년 뒤에도 남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예산이 단순한 지출목록에서 국가의 미래에 대한 투자계획으로 바뀐다. 특히 이번 예산은 지방과 교육재정에도 상당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정부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의 내국세 연동 구조를 개편하고, 절감 재원을 미래 인재 양성 등에 다시 투자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재정구조를 바꾸는 일에는 반드시 양면성이 존재한다.
중앙정부의 재정 효율성이 높아지는 만큼 지방정부의 재정 여건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는지, 교육의 질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지역 간 격차가 확대되지는 않는지 함께 살펴야 한다. 재정개혁의 목적은 숫자를 줄이는 것이 아니다. 더 적은 돈으로 더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결국 820조 원 시대에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은 예산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과거에는 예산이 얼마나 늘었는가를 놓고 정부의 의지를 평가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얼마나 늘렸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바꾸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청년의 첫 직장이 늘었는가. 가계의 주거비 부담이 줄었는가. 병원비 부담이 낮아졌는가. 지역에 기업과 사람이 돌아왔는가. 중소기업의 생산성이 높아졌는가. AI 투자가 실제 산업 경쟁력으로 연결됐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 세대가 지금보다 더 나은 출발선에 설 수 있게 되었는가. 이것이 820조 원의 성적표가 되어야 한다.

국가가 돈이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도 위험하다. 그러나 더 위험한 것은 돈은 많은데 제대로 쓰지 못하는 국가다. 100조 원 시대의 작은 비효율과 800조 원 시대의 작은 비효율은 무게가 다르다. 예산 규모가 커질수록 실패의 비용도 커진다. 그러므로 재정의 생산성이 곧 국가의 실력이다. 정부가 말하는 성장주도형 재정 선순환이 정말 작동하려면 국민은 그 선순환의 고리를 직접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세금이 들어가고, 투자가 이루어지고, 기업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가계소득이 늘어나고, 소비와 투자가 다시 살아나고, 경제가 성장해 세수가 늘어나는 구조다. 그리고 다시 미래에 투자할 재정 여력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선순환이다. 반대로 돈을 투입하고도 생산성도 일자리도 소득도 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선순환이 아니라 지출의 반복일 뿐이다.
2027년도 예산안은 이제 국회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국회의 역할 역시 얼마를 깎을 것인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어떤 사업을 늘리고 어떤 사업을 줄일 것인지, 무엇을 기준으로 성과를 판단할 것인지 따져야 한다. 주요 사업의 핵심성과지표를 국민에게 공개하고, 예산 집행 이후 실제 성과를 평가해 다음 연도 예산에 반영하는 환류 시스템도 강화해야 한다. 예산은 한 번 쓰고 끝나는 돈이 아니라 다음 예산을 결정하는 학습의 기록이어야 한다.
820조 9천억 원. 이 거대한 숫자는 결국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금과 경제활동에서 나온 돈이다. 따라서 국민이 묻는 것은 결코 과도한 요구가 아니다. 그래서 내 삶이 얼마나 좋아지는가. 이 질문에 정부가 구체적인 숫자와 결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예산의 크기가 국가의 능력을 보여준다면, 예산의 결과는 정부의 실력을 보여준다. 800조 시대의 첫 예산. 이제 국민이 지켜봐야 할 것은 국회 보고서의 숫자만이 아니다.
청년의 첫 직장에, 부모의 병원비 고지서에, 가계의 장바구니에, 직장인의 월급통장에, 지역에서 다시 켜지는 가게의 불빛에,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 820조 원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를 지켜봐야 한다. 국가의 진짜 예산서는 결국 국민의 삶에 쓰인다.
그래서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820조 원을 썼습니까?”가 아니라 820조 원으로 대한민국을 얼마나 바꾸었습니까? 바로 그 답이 800조 시대 정부의 성적표가 될 것이다.

조선규 | 칼럼니스트
35여 년간 교육과 기업 경영, 그리고 지역 사회 발전의 현장에서 사람과 함께 성장해왔다. “삶의 문제는 결국 사람의 문제”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교육을 통해 변화를 만들고, 기업을 통해 길을 열었으며, 현재는 사회 곳곳의 다양한 문제를 함께 풀어가며 더 따뜻하고 공정한 미래를 그려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