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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해설] 송정란의 "이영도傳"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시조 해설] 송정란의 "이영도傳"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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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01]

이영도傳

 

송정란

 

그대는 저 먼 곳에서 거센 물살로 밀려들고

그대보다 더 먼 곳에서 내 그리움은 멈추어 서네

청상의 가녀린 목덜미 숙여 뒤돌아서는 설움이라

 

생각을 멀리하면 잊을 수도 있다는데/ 고된 살음에 잊었는가 하다가도/ 가다가 월컥 한 가슴 밀고 드는 그리움**

 

사무쳐 시절 인연이 파도가 되어 일렁이면

삶의 수고로움을 한켠에 밀어놓고

수놓듯 한 땀 한 어절씩 지어 올린 시들이여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세상에 흔해 빠진 게 사랑이라 하지만

한낱 유행가로 떠돌다 잊혀지는

한 시절 돋아났다 시들어버린 헛된 맹서가 아니어라

 

꽃잎 진 자리에 다시 만나 피어나리라

겹겹 숨겨둔 속잎 못다 한 말씀 함빡 피우며

그토록 그립던 그대인가, 환한 봄날 마주 보며…

 

*이영도(李永道, 1916~1976) : 호는 정운(丁芸), 이호우의 누이동생. 1945년 동인지 『죽순』으로 등단. 시조집 『청저집』(1954), 『석류』(1968, 이호우 공동시집), 『언약』(1978, 유고집) . 청마 유치환이 20년간 수천 통의 연서를 보냈으며, 유치환 사후 2백여 편을 추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펴냈다.
 

**이영도 시조 「그리움」 전문.

***유치환 시 「행복」 마지막 연 발췌.

 

—『象』(고요아침, 2024)에서

그토록 그립던 그대인가, 환한 봄날 마주 보며…[이미지: 류우강 기자]

  [해설

  20년 동안의 사랑을 결국 이루지 못하고
 

  (토요일에 시조를 다뤘어야 하는데 시를 했었기에 오늘 시조를 다룹니다.)

 

  유치환은 해방되던 해인 194510월에 고향인 통영의 통영여자중학교에 국어교사로 부임한다. 마침 그때 그 학교에 이영도도 갓 부임해 있었다. 이영도는 나이 스물아홉 살 때 폐결핵에 걸린 남편이 사망하자 평생 재혼하지 않고 딸 하나를 키우며 살아간다. 유치환은 13(장남은 일찍 죽는다)의 아버지인데 8년 연하의 과부 교사를 사랑하여 줄기차게 편지를 보낸다. 흔히 5,000통을 썼다고 하는데 매일 한 통씩 쓴다고 해도 14년을 써야지 5,000통이 된다. 5,000통은 과장인 듯하고, 일주일에 한 통 정도는 쓰지 않았을까?

 

  유치환은 매주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쳤지만 이영도는 답장을 매번 하진 않고 간혹 했을 것이다. 그 답장을 유치환의 집으로는 부칠 수 없었고 학교에서 몰래 전했을 것이므로 스릴 만점의 연애였다. 유치환의 열렬한 구애를 이영도가 거부하지 않고 받아주었다는 것이 신기하다. 교통사고로 유치환이 사망한 것이 1967213일이었는데 유치환이 이영도에게 마지막으로 부친 편지가 19661231일에 쓴 것이니 1946년부터 시작된 편지 쓰기가 1966년까지 이어진 것이었고 정말 장구한 세월에 걸친 구애였다.

 

  송정란 시인은 20년에 걸친 사랑의 역사를 한 편의 시조로 압축한다. 제목은 이영도傳이지만 이 시조의 화자가 바로 이영도다. 유치환이 이영도를 일방적으로 사랑한 짝사랑이 아니었음을 제1연이 말해준다. 유치환만 이영도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이영도 또한 유치환을 그리워하고 이뤄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슬퍼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2연은 이영도의 시조인데 사실은 사랑 고백이다. , 왜 그대는 유부남인가. 한번 안아볼 수도 없는 사람이여. 그대의 편지를 받아볼 때마다 내 가슴은 찢어진답니다. 아이를 재우고 나서 하염없이 웁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이 사랑에 절망하여.

 

  이 시조의 마지막 두 연은 송정란이 연구한 이영도의 내면세계이다. 이런 심정으로 그 시절을 버텼는데 유치환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절망하고 말았으리라. “꽃잎 진 자리에 다시 만나 피어나리라는 사후에야 비로소 마음껏 사랑하게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겹겹 숨겨둔 속잎 못다 한 말씀 함빡 피우며/ 그토록 그립던 그대인가, 환한 봄날 마주 보며…도 한평생 몰래몰래 한 사랑을 사후에는 마음껏 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라는 애절한 사연이다.

 

  이영도가 중앙출판공사의 편집장 이근배 시인에게 200여 통의 편지를 넘겨 유치환과의 사랑 이야기를 세상에 공개하게 된 경위가 재미있다. 유치환의 사후 몇 명 여성이 자기가 받은 겨우 몇 통의 편지를 동료 문인들에게 내놓으며 유치환과의 은밀했던 관계를 말하자 이영도는 문단의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즉 자신만이 유치환과 20년 이상 진실한 사랑을 나눈 유일한 사람임을 증명하고자 편지를 출판사에 들고 가 서간집 『사랑하였으므로 幸福하였네라』가 나올 수 있게 한 것이다. 송정란의 시조집에는 공옥진, 윤심덕, 김완주(김일엽), 김만덕, 계섬, 설죽, 황진이, 김덕만(선덕여왕)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1調13, 214, 315, 49수인데 이번 시조집의 작품이 전부 좋다. 최근에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역락)란 책을 내면서 유치환론을 5편 써 게재했는데 그중 하나가 30쪽에 이르는 장문의 「유치환의 애절한 편지와 시의 상관관계」여서 「이영도傳」을 읽고 얼마나 반갑던지! 아무튼 유치환은 편지에서 호가 정운(丁芸)인 이영도를 정향(丁香)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면서 이런 편지를 써 일주일이 멀다 하고, 아니 사흘이 멀다 하고 보내곤 했다. 그는 과연 바람둥이였을까? 두 편만 소개한다.

 

  어제는 당신을 보지 못하고 하루를 보내었군요. 오후, 들에 나갔었는데 저편 신작로 길을 푸른 옷자락이 오기에 당신인가 하고는 실없이 가슴 셀레었습니다. 물론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당신이 나의 생각에서 일시를 떠나지 않고 전부를 차지하고 있어서야 어떻게 배긴단 말입니까? 하다못해 누구를 붙들고 당신 이야기라도 실컷 하여 보았으면 마음 풀릴까도 싶은 마음입니다.

정향! 참으로 허망한 세월이요 하늘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슬퍼집니다. 생각지 말자고 머리를 저어보기도 합니다.

정향! 시방 이 시간이 당신도 응당 잠깨어 일어나 계실 이 시간이 어쩌면 당신과 나만을 위하여 있는 성스러운 시간 같아 이렇게 일어 앉아 있는 것이 즐겁습니다. 그리고 마음 저립니다. 당신이 지금 무얼 생각하고 있는가를 나는 압니다. 그러나 하마 종이 울릴 것 같으니 당신은 이제 교회로 나가시고 말겠지요. 나만 여기 절망에 남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녕!

 

1952627일 당신의 馬

 

  죽고만 싶은 세상입니다. 휘휘 저어버리고만 싶은 세상입니다. 당신 앞에 엎디어 한없이 뉘우치고 울부짖었으면 시원하겠습니다. 어찌하여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습니까? 어느 세상에 가서 바꿀 수 있겠습니까? 나의 사랑이여, 귀한 나의 정향이여! 이렇게도 나의 모든 존재를 차지하고 있는 당신―당신을 두고서 무슨 내게 영욕(榮辱)이며 포폄(褒貶)이 있겠습니까! 죄를 쓰고 세상을 쫓기기로 뉘우치지 않으리다. 아버지여. 이 나를 벌하라, 벌하라. 나의 이 사랑을 벌하겠거든 벌하라. 정향!

 

195272일 당신의 馬

 

  [청마 유치환]

 

  한국 근대문학사의 거목으로 꼽히는 시인으로, 1908년 경남 거제시 둔덕면에서 8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극작가 동랑 유치진이 청마의 맏형이다. 동래보통학교와 일본 부장중학교를 거쳐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였으나, 1928년 학교를 중퇴하고 그해 10, 11세부터 알고 지내던 권재순과 결혼한다. 1930년 《문예월간》에 「정적」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한 후, 1939년에 첫 시집인 『청마시초』를 출간하였다.이후 교직에 몸담으며 40여년 간 열정적인 시작활동을 통해 총 14권에 달하는 시집과 수상록을 출간했다. 1947년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제1회 시인상을 비롯하여 서울시문화상, 아시아재단 자유문화상, 7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부산시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1967년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60세에 생을 마감했다

 

[송정란 시인]

 

경기대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건양대 교수 역임. 1990년 《월간문학》 시,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산으로 등단. 시조집 『허튼층쌓기』, 시집 『불의 시집』, 『화목』, 저서 『한국 시조시학의 탐색』, 『스토리텔링의 이해와 실제』 등. 시조시학상, 동국문학상 등 수상.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시와시학상편운상가톨릭문학상유심작품상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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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시인#이영도시인#이영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