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두려움 없이 세상과 마주하는 여성의 서사… 정정엽 개인전 《지구독대여자》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표 작가로 평가받는 정정엽이 개인전 《지구독대여자》를 통해 다시 관객들과 만난다. 이번 전시는 6월 17일부터 8월 12일까지 서울 인사동 갤러리밈 M’VOID(엠보이드) 5층과 6층에서 열리며, 회화와 바느질 작업 등 신작 23점을 선보인다.

정정엽은 1980년대부터 여성주의와 생태주의적 시각을 바탕으로 회화,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영역에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작가다. 2018년 고암미술상, 2022년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하며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굳건한 위치를 다져왔다.
이번 전시 ‘지구독대여자’는 홀로 지구와 마주하는 여성의 존재와 성장에 대한 은유를 담고 있다. 작가는 밤길을 걷는 여성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이를 극복하며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과정을 ‘소녀생존기’ 연작으로 풀어냈다. 나무 판넬의 결을 따라 움직이는 붓질과 여성의 몸짓은 물방울, 불꽃, 고사리 잎과 만나 하나의 성장 서사를 만들어낸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길이 390cm에 이르는 대작 《텃밭》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푸성귀와 벌레, 나방들은 거대한 생명력을 뿜어내며 인간 중심의 시각을 넘어 생명 공동체의 연결성을 드러낸다. 작가는 손바닥만 한 텃밭을 돌보는 일이 곧 우주를 돌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나방-미산리》 연작은 혐오와 기피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나방을 확대해 묘사함으로써 인간과 비인간 존재 사이의 관계를 재조명한다. 나방은 단순한 곤충이 아니라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이종(異種) 친족’으로 제시된다.

또 다른 주요 작품인 《싹》 연작은 감자에서 돋아난 작은 싹을 거대한 우주적 존재로 확장시킨다. 먹거리로만 소비되던 존재가 스스로 생명을 발현하는 주체로 변화하는 과정이 화면 속에서 강렬한 에너지로 구현된다. 작가는 미약한 존재들이 품고 있는 원초적 생명력과 공존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30여 년 동안 콩과 팥을 주요 소재로 작업해온 정정엽은 신작 《씨앗-풍경》에서 붉은 팥을 바다와 하늘 사이를 떠다니는 군집으로 표현했다. 무수한 팥알들은 새떼처럼 유영하며 일상의 노동과 생명의 숭고함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가장 작고 하찮아 보이는 존재가 가장 거대한 생명의 우주를 이룬다는 역설이 캔버스 속에 펼쳐진다.
작가는 작업노트에서 “벌레 한 마리도 지구와 독대하는 충만함이 있다”고 말한다. 여성으로 살아가며 체득한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그 속에서 길을 찾아가는 몸짓이 작품 속 소녀와 벌레, 나방, 감자싹으로 변주된다. 정정엽에게 그림은 결국 자신과 세계, 그리고 타자와의 ‘독대’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이번 《지구독대여자》전은 낮고 보잘것없다고 여겨졌던 존재들의 연대를 통해 생명과 공존, 여성의 성장과 자유를 사유하는 자리다. 거대한 서사보다 작은 존재들의 숨결에 귀를 기울여온 정정엽의 회화는 오늘날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생명의 가치와 관계의 의미를 다시 묻고 있다.
전시 개요
- 전시명 : 《지구독대여자》
- 작가 : 정정엽
- 기간 : 2026년 6월 17일 ~ 8월 12일
- 장소 : 갤러리밈 M’VOID(엠보이드) 5·6층
- 출품작 : 회화, 바느질 작업 등 신작 23점
작가 소개
정정엽(1962~)은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으며, 여성주의 미술과 생태주의 미학을 바탕으로 30여 년간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흐름을 이끌어왔다. 고암미술상(2018), 이중섭미술상(2022)을 수상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