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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50] 박찬호의 "유언 2—딸에게"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50] 박찬호의 "유언 2—딸에게"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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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유언 2

—딸에게

 

박찬호

 

  이제 남은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사실 언제나 그랬듯 지금도 어제처럼 살 뿐인데 그래도 너를 마주한 이 순간 마음이 초조한 것은 남은 그 시간이 정말 바로 코앞에 왔다는 증거인 것 같구나.
 

  이제서야 하는 말이지만, 나는 너를 단지 꽃으로, 사슴으로, 예쁜 풍경으로만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네가 나를 위한, 세상을 위한 투사로 남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 아들 구분 없이 너 또한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아픔을 같이하는 누군가의 자식이자 엄마로서 같은 인간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또 그런 그윽한 눈으로 세상을 봤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너도 겪고 있다시피 그 누구의 삶도, 그 어떤 삶의 방식도 절대적인 삶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게다. 단지 우리에게 단 하나 버릴 수 없고, 버려서도 안 되는 기준이 있다면 그것을 네가 인정한다면, 그건 바로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런 부끄럼 없는 삶을 위해서 쉽게 미워하지 말고, 쉽게 슬퍼하지 말고, 또 쉽게 분노하지 말고, 그렇게 쉽게 지치지 말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어떤 것이든 중요치 않다. 누구의 얘기도 중요치 않다. 사람들의 시선 따위도 중요치 않다. 모든 것은 네게 달렸고 바로 그 중심에 네가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거칠 것 없이 살아라. 괜찮다. 옳은 것을 위해, 맞다고 생각되는 신념을 위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위해 지금 일어나라. 밖으로 나가라. 주저하지 말고 소리 질러라. 그렇게 후회 없이 살아라. 그것이 이 아비가 이 시간에, 이즈음에 그간 너에게 하지 못했던 마지막 한마디이다. 꼭 행복했으면 하는 딸에게 바라는 비밀스러운 한마디이다.

 

  지금, 마지막 몇 마디를 딸에게 전하는 이 시간에 창밖에는 가을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구나. 분명 내년 이 시간에는 보지 못할 비구나. 사람들이 이 비 내리는 가을을, 가끔은 하늘 끝 간데없이 높고 푸른, 그 가을이 아름답다고 얘기하는 것은 울긋불긋 꽃들이 화려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곧 춥고 어두운 겨울이 닥쳐올 것임을 알면서도 의연하고 거침없이, 두려워하지 않고, 피하지 않고, 자신들의 그 본능적 뜻을, 태생적 가치를 최대한 알리려고 하는 데 있다. 그것을 보고 안 보고, 그 뜻을 알고 모르고는 보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렇게 산천초목들은 후회 없이 제 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가을이 더 아름다운 것이다.

 

  이제 비도 그치고 네게 쓰는 편지의 펜을 놓을 때가 되었구나. 더 이상은 얘기할 수 없는 그때가 왔구나. 이 펜을 놓으려니 왜 자꾸 너와의 인연이, 잘해주지 못한 후회의 연민이 밀려오는지 모르겠구나. 안타까움만 깊어지는지 모르겠구나.

 

  마지막으로 정말 그간 네게 못했던 한마디만 하겠다. 평생을 가슴에 담아온 그 한마디만 하겠다. 너는 잘 못 느낀 그 한마디만 하겠다. 사실, 그동안, 살아가던 그동안, 눈물 나도록 너를 사랑했다. 가을 산천의 붉은 꽃처럼 사랑했다. 나의 사랑하는 딸아.

 

—『지금이 바로 문득 당신이 그리운 때』(시작시인선, 2023)

 

 

유언 _ 박완규 [이미지 :류우강 기자]

  [해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대학 4년 후배인 박찬호는 졸업 후 광고계로 가더니 회사를 차렸다. 중동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회사를 키웠는데 병마가 찾아왔다. 비강 내의 기형암 육종, 피부에 나는 악성 흑색종 등 3종의 암이 한꺼번에 닥쳤다. 1차 항암치료, 2차 항암치료, 방사선치료, 항암제 링거……. 그 뒤에도 몇 번 더 병마가 덮쳤다. 어디를 잘라내고 어디를 치료하고……. 지난 몇 년 동안 그는 병원과 회사를 오가는 치열한 투병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목숨이 촌각을 다투게 되자 종이에다가 광고 문안이 아닌 시를 쓰기 시작했다. 2020년에 등단하더니 2021년에 제1시집을, 2023년에 제2시집을, 2024년에 제3시집을 냈다. 목숨을 태워서 쓴 시가 500편이나 된다.

 

  아내와 딸과 아들에게 유서를 따로 썼다. 저승사자가 방문 앞까지 찾아왔다고 생각되어 쓴 시이니 꾸미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고, 오로지 진심으로 한 자 한 자 썼을 것이다. 딸에게 쓰는 유서인데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런 부끄럼 없는 삶을 위해서 쉽게 미워하지 말고, 쉽게 슬퍼하지 말고, 또 쉽게 분노하지 말고, 그렇게 쉽게 지치지 말고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런 멋진 아빠가 어디 있는가.

 

  그리고, “옳은 것을 위해, 맞다고 생각되는 신념을 위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위해 지금 일어나라. 밖으로 나가라. 주저하지 말고 소리 질러라. 그렇게 후회 없이 살아라. 그것이 이 아비가 이 시간에, 이즈음에 그간 너에게 하지 못했던 마지막 한마디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훌륭한 아빠가 어디 있는가.

 

  찬호 후배는 가족과 결별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절감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을 것이다. 이 지상에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반드시 사라지지만, 그냥 살아가는 것과 최선을 다해 제 몫을 사는 것과의 차이를 그는 딸에게 유언으로 말해준다. 사람들이 가을이 아름답다고 얘기하는 것은 이제 곧 춥고 어두운 겨울이 닥쳐올 것임을 알면서도 의연하고 거침없이, 두려워하지 않고, 피하지 않고, 자신들의 그 본능적 뜻을, 태생적 가치를 최대한 알리려고 하는 데 있다. 그것을 보고 안 보고, 그 뜻을 알고 모르고는 보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렇게 산천초목들은 후회 없이 제 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가을이 더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후배는 다행히도 상태가 호전되어 회사를 잘 꾸려가고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모양이다. 나는 생각한다, 시가 찬호를 살렸다고.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나는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것이 스피노자인지 루터인지 모르겠지만 찬호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오늘 시를 쓸 것이다. 유서를 쓰듯이. 목숨을 태워.

 

  [박찬호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LG애드 PR/SP 부문 근무. 현재 광고 마케팅 프로모션 회사 운영. 2020년 계간 《미래시학》과 《월간 시》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시집 『꼭 온다고 했던 그날』『지금이 바로 문득 당신이 그리운 때』『그곳에 그리도 푸른 바다가 있을 줄이야』를 냄.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시와시학상편운상가톨릭문학상유심작품상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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