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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해설] 민병도의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시조 해설] 민병도의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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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34]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민병도

 

이 세상 쓰임 끝난,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선량한 하인처럼 도중에 버리지 않고

한평생 나를 모셔준 내 몸에게 절하겠네

 

부모의 땀과 눈물 닦아줄 줄 모르고

갖지도 못할 거면서 엽전의 유혹 앞에

한사코 떠나려 했던 불효를 속죄하겠네

 

내 목숨의 권리인 양 무도하게 빼앗아온

미안한 생명들과 어지럽힌 이웃에게

공손히 신발을 벗고 두 무릎을 꿇겠네

 

나로 인해 상처받고 눈물 흘린 이웃들과

내 것인 양 착각하고 방자했던 시간 앞에

지은 죄 자백한 뒤에 돌팔매를 맞겠네

 

그래도 남은 시간은 연씨, 차씨 가려 심고

남은 이의 눈과 마음, 벙글게 기도하며

미완의 절명시 한 편 쓰다 말고 가겠네

 

―『새벽 물소리』(목언예원, 2025)

 

복장이 현대 한국 노인의 복장으로 바꿔줘요
오늘이 마지막이라면_민병도 [ 이미지:류우강 기자]

  [해설]

 

  노시인의 유언장

 

  칠순의 노신사 민병도 시조시인은 뵐 때마다 우리 시단의 큰 스승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조 쓰기와 한국화 그리기, 예술창작공간 목언예원 가꾸기에 있어 한 치 빈틈이 없기 때문이다. 요즈음에는 동시와 동시조까지 쓰고 있어 一家를 이룬 게 아니라 五家를 이루고 있다. 『구름 과자』란 동시조집은 금방 재판을 찍을 모양이다.

 

  단체의 장이 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총 다섯 수로 된 이 시조는 그런 자신을 경계하기 위해 쓴 자성록이자 유언장이다. 오늘이 바로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 아닐까 생각하고선 자기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서양에는 명상록이란 것이 있고 동양에는 자전(혹은 자서전)이 있는데 대체로 자신을 미화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민병도 시인은 지금까지 나를 모셔준 내 몸에게 먼저 고마움을 표한다. 큰 병 없이 지금까지 지탱해주었으니 몸에게 고마움을 표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내 생의 마지막 날, (물론 상상이지만) 내 몸에게 마음의 절을 올리겠다는 사람은, 내가 알기론 민병도 시인이 처음이다.

 

  이어서 나를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께 불효한 것을 속죄하겠다고 말한다. “갖지도 못할 거면서 엽전의 유혹 앞에” 굴복해 한사코 부모님 슬하를 떠났던 자신의 지난날을 반성하면서 속죄하니 저승의 부모님도 하늘의 절대자도 민병도 시인을 용서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내가 이빨로 삼킨 생명체들과 내가 곤혹스럽게 했던 이웃들에게 용서를 빈다고 한다. 멸치도 생명체고 소와 돼지, 닭과 오리도 생명체인데 지금까지 도대체 내가 몇 마리나 먹었을까. 동료문인과 선배와 후배들에게 내가 잘못한 것은 없었을까? 공손히 신발을 벗고 두 무릎을 꿇겠다고 한다.

 

  “나로 인해 상처받고 눈물 흘린 이웃”들에게 내가 행한 못된 짓에 대해 속죄하겠다니 그러지 마시라고 일으켜 세워드리고 싶다. 그래도 남은 시간에는 연씨와 차씨를 심고 주변 사람들의 눈과 마음이 벙글게 기도를 하겠다고 말한다. 다섯째 수의 종장이 절묘하다. 미완의 절명시 한 편을 다 쓰고 가겠다고 하지 않고 쓰다 말고 가겠다고 한다. 50년 동안 시조를 써왔지만 작품다운 것은 없는 것 같으니 의사 강우규나 역사학자 황현이 남긴 절명시(絶命詩) 같은 시를 쓰다가 그것도 미완인 채로 죽을 거라는 예감이 드는 것이다. 아아, 나는 민병도 시인에게 겸허함과 치열성을 배워야 한다.

 

  [민병도 시조시인]

 

  1953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영남대 미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7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마을」이 당선되고 1978년 《시문학》지에 시 「기러기」로 천료하였다. 2000년 예술창작공간 ‘목언예원’을 개원하였다. 현재 《시조21》 발행인, (사)국제시조협회 이사장, 이호우ㆍ이영도 시조문학상 운영위원장, 도서출판 목언예원ㆍ민병도갤러리 대표로 있다. 한국시조작품상ㆍ대구시조문학상ㆍ중앙시조대상ㆍ가람시조문학상ㆍ한국문학상ㆍ외솔시조작품상ㆍ김상옥시조문학상ㆍ유심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조집 『칼의 노래』『무상의 집』『지상의 하루』『청도』『바람의 길』『일어서는 풀』 등을 냈다. 시화집으로 『매화 홀로 지다』『흐르는 강물처럼』이 있다. 문학평론집 『형식의 해방공간』『시조, 정형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비정형의 정형화』『정형성, 그 오묘한 질서의 미학』, 수필집 『강물은 자신을 밟고 길을 낸다』『꽃은 꽃을 버려서 열매를 얻는다』 등이 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시와시학상편운상가톨릭문학상유심작품상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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