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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해설] 유재영의 "인사동 은발"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시조 해설] 유재영의 "인사동 은발"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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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36 ]

  인사동 은발

 

  유재영

 

  주소만 달랑 들고 해종일 찾아간 곳

  저물녘 겨우 찾아 당도한 사립문 앞

  부르고 거듭 불러도 기척조차 없었다

 

  돌아설까 어쩔까 섭섭한 맘 주저할 때

  “뉘신교?” 소리 함께 반만 열린 외짝 문

  소년은 노모와 함께 수를 놓고 있었다

 

  그 사람은 서덕출, ‘봄 편지를 쓴 시인

  깨끗한 이마에다 반달처럼 등이 굽은

  서울서 찾아간 이는 윤석중 씨였다고

 

  잎차 한 잔 앞에 놓고 허영자 선생은

  은발 같은 목소리로 봄 편지를 암송했다

  누군가 왠지 만날 듯, 봄이 오는 인사동.

 

  ―『달항아리 어머니』(동학사, 2025)에서

 

  [해설]
  
  마침내 봄이 왔구나

 

  45일이다. 오늘은 한식이고 식목일이다. 화마가 휩쓸고 간 산간에도 씨앗이 날아가 싹을 틔울까. 내가 초등학생, 중학생일 때는 봄소풍 가듯이 식목일 행사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요즘도 그런 植木日 행사를 하는지 모르겠다.

 

  유재영 시인의 시조를 보니 봄이 오기는 왔다. 시인이 봄을 어디서 느꼈느냐 하면, 허영자 시인께서 은발 같은 목소리로 「봄 편지」를 암송하는 데서 느꼈다고 하니 시인은 역시 범인과 다르다. 「봄 편지」는 서덕출 시인이 쓴 동요로서 작곡가 윤극영이 곡을 붙였다. 19264월호 《어린이》에 발표되었으니 100년 전 작품이다.

 

  이 시조에 이름이 나오는 서덕출은 1906년에 울산에서 태어나 1940년에 작고한 동요작가이다. 다섯 살 때 대청마루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었다. 정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고 어머니에게서 한글을 배워 동요를 짓기 시작했다. 동요 「봄 편지」 외에도 많은 동요를 지었으나 살아생전에는 동요집을 내지 못했고 작고한 후 10년이 지나서야 지인들이 그의 유작들을 모아 1949년에 동요집 『봄 편지』를  출간하였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취지에서 매년 울산에서는 서덕출 창작동요제가 개최되고 있고 1968년 울산 학성공원에 봄 편지 노래비가 세워졌다. 울산광역시 중구문화원에서는 그의 시 정신을 기려 서덕출 백일장을 매년 개최하고 있다.

 

  이 시조는 전반부와 중반부에 윤석중이 서덕출을 찾아간 내용이 나온다. 윤석중은 1911년생이니 서덕출보다 다섯 살 밑이다. 잡지에서 서덕출이 쓴 아주 뛰어난 동요를 몇 번 보고는 매료되어 천 리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울산까지 갔다고 하니 참 대단한 열정이다. 윤석중은 붙임성도 좋았나 보다. 시조 속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주소만 들고 서덕출을 찾아간 윤석중의 사교성도 경탄할 만하다. 아마도 작품을 청탁하기 위해서 내려간 것이겠지만 시인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

 

  어떤 자리에서였을까? 잎차 한 잔을 앞에 놓고 시도 아니고 노래도 아니고 동요를 읊은 것은 허영자 시인이었다.

 

  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잎을 따서요

  우표 한 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조선 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옵니다.

 

  이 동요를 쓴 것이 딱 100년 전이었다는 것이 놀랍다.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이 세월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상황과 타협하거나 상황에 항복한다. 그런데 화자는, 아니 시인은 이런 정감있는 시조를 쓰고 있다. 허영자 시인이 1938년 경남 함양 출생이니 서덕출 동요시인과는 세대차가 좀 있다. 허영자 시인이 은발을 날리면서 하는 낭송을 들으면서 유재영 시인은 지상낙원을 꿈꾸었을 것이다.

[유재영 시인]

 

1948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시인이자, 북디자이너. 1973년 박목월 시인으로부터 시가, 이태극 선생으로부터 시조가 추천되다. 시집 『한 방울의 피』『지상의 중심이 되어』『고욤꽃 떨어지는 소리』『와온의 저녁』『구름 농사』 등과 시조집 『햇빛 시간』『절반의 고요』『느티나무 碑銘』 등을 펴냈다.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겸임교수로 북디자인과 현대시를 강의하였으며 오늘의 시조문학상, 중앙일보 시조대상, 이호우문학상, 편운문학상, 대한출판문화협회와 교보문고가 주관한 북디자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중학교 국정 교과서에 작품 「둑방길」 이 수록되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나무 앞에서의 기도』 『사람 사막』 등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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