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규 칼럼] 한국이 제안한 AI의 공공성, 왜 지금 세계가 주목하는가
외교의 성과는 종종 숫자로 요약됩니다. 몇 개국을 만났는지, 몇 건의 합의를 했는지, 어떤 문서에 서명했는지가 먼저 보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숫자 뒤에 무엇이 바뀌었는가입니다. 지난 3월 17일 스위스 제네바 방문에서 한국 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국제이주기구(IOM),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세계보건기구(WHO), 세계식량계획(WFP), 유엔개발계획(UNDP) 등 6개 주요 유엔 기구와 ‘글로벌 AI 허브’ 협력 의향서에 서명한 일은, 단순한 행사성 외교로 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기술 수요를 따라가는 나라가 아니라, 기술의 사용 목적과 국제 협력의 방향을 함께 설계하는 나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합의의 핵심은 AI 허브가 단순한 연구센터나 상징적 간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허브는 유엔 기구들과 한국의 공공·민간 부문을 연결해, 인공지능 기반으로 세계적 난제를 풀기 위한 플랫폼으로 구상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기술 자체를 과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보건, 노동, 이주, 통신, 식량, 개발처럼 서로 다른 국제 의제를 하나의 기술 협력 구조 안에서 묶어내는 시도입니다. AI를 산업정책의 도구에만 가두지 않고 국제 공공문제 해결의 매개로 확장하려는 발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습니다.
여기서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한국이 이번에 단지 “참여하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를 먼저 제안했다는 사실입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정부는 AI 허브의 초기 구성과 운영에 필요한 재원에 한국이 적극 기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국제협력에서 의제 제안권은 대개 재원, 실행 의지, 제도 설계 능력을 가진 쪽으로 이동합니다. 결국 이번 성과의 본질은 회의장에 앉았다는 데 있지 않고, 한국이 기술과 규범, 재원과 실행을 함께 논의할 수 있는 파트너로 인정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이 변화는 국제질서의 빈틈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최근 미국은 유엔 개혁 압박을 강화하면서 여러 유엔 기구에서 발을 빼거나 수백만 달러 규모의 감축을 병행해 왔고, 유엔 재정 전반도 불안정성이 커진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국제기구들이 기술력만 있는 나라보다, 민주적 정당성과 예측 가능한 협력 태도, 그리고 다자주의에 대한 신뢰를 함께 가진 파트너를 더 절실히 찾게 됩니다. 한국이 바로 그 틈에서 기회를 얻고 있습니다. 초강대국의 힘을 그대로 대체해서가 아니라, 흔들리는 다자주의를 실무적으로 지탱할 수 있는 ‘신뢰 가능한 중견국’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이번 구상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드러납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내세운 비전은 “AI for All” 곧 모두를 위한 인공지능입니다. 저는 이 흐름을 ‘공공지능(Public AI)’이라는 말로 읽을 수 있다고 봅니다. 공공지능이란 AI를 누군가의 이윤 극대화나 군사적 우위의 수단으로만 보지 않고, 의료 접근성 개선, 교육 기회 확대, 식량 위기 대응, 노동 안전, 이주 관리, 개발 격차 해소처럼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공공재적 기술로 이해하는 관점입니다. 실제로 이번에 함께한 6개 유엔 기구의 영역을 보면, 한국이 제안한 AI의 쓰임새가 어디를 향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보건은 WHO, 식량은 WFP, 노동은 ILO, 이주는 IOM, 디지털 규범과 연결성은 ITU, 개발은 UNDP가 상징합니다. 이것은 매우 구체적인 국제 공익의 지도입니다.
한국이 이 의제를 제시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도 나올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래서 설득력이 있습니다. 한국은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정보통신 강국으로 전환한 몇 안 되는 국가라는 점을 스스로 강조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글로벌 사우스와 취약계층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이 메시지가 중요한 이유는, AI 격차가 단지 기술 격차가 아니라 국가 역량과 복지 격차, 나아가 생존 격차로 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경험은 “성장했다”는 자부심보다 “격차를 어떻게 줄일 수 있는가”라는 실천적 서사로 번역될 때 국제적으로 더 큰 설득력을 가집니다.
경제적 파급효과 역시 과장이 아니라 구조로 봐야 합니다. 제네바가 왜 특별한 도시인지 보면 답이 나옵니다. 유엔 제네바 사무소에 따르면 제네바에는 약 40개의 국제기구, 180개가 넘는 상주대표부, 400개 이상의 NGO가 모여 있습니다. 이처럼 국제기구가 한곳에 밀집하면 회의와 규범, 인재와 자본, 연구와 서비스 산업이 함께 모이는 집적 효과가 생깁니다. 국제제네바 공식 자료는 국제 공공부문 일자리 1개가 지역에서 약 0.5개의 추가 일자리를 유발한다고 설명합니다. 즉, 국제기구 하나가 들어온다는 것은 건물 하나가 생긴다는 뜻이 아니라, 법률,번역, 컨설팅, 교육, 의료, 숙박, 전시, 스타트업, 연구소까지 연쇄적으로 움직이는 생태계가 형성된다는 뜻입니다. 한국이 이 허브를 제대로 안착시킨다면 “아시아의 제네바”라는 표현은 수사가 아니라 일정 부분 경제지리학적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섣부른 자축입니다. 협력 의향서 서명은 분명 중요한 출발이지만, 최종 성과는 아닙니다. 의향은 실행으로, 실행은 제도로, 제도는 성과로 이어져야 비로소 국가 자산이 됩니다. 실제 유치와 운영을 위해서는 부지 선정, 예산 확보, 범정부 거버넌스, 국제기구와의 법적 지위 조정, 데이터 이동과 개인정보 보호 원칙, 다국어 전문인력 양성, 민간기업과 공공부문의 역할 분담이 뒤따라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이번 성과는 박수로 끝낼 일이 아니라 행정과 입법, 산업과 교육이 동시에 준비해야 할 ‘국가 프로젝트의 문턱’에 올라섰다는 뜻입니다.
특히 한국이 진정으로 선점해야 할 것은 건물이 아니라 규범입니다. AI 시대의 패권은 누가 더 큰 모델을 만들었는가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누가 더 신뢰할 수 있는 원칙을 제시하는가, 누가 더 많은 나라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표준을 만드는가, 누가 더 약한 나라와 계층까지 기술의 편익을 확장하는가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AI for All’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한국이 기술 강국을 넘어 규범 설계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문장입니다. AI를 공공성, 민주주의, 윤리, 접근성의 언어로 번역해내지 못하면, 어떤 허브도 결국 산업 홍보관에 머물 가능성이 큽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분명합니다. 한국은 이번 외교적 성과를 세 가지로 연결해야 합니다. 첫째, 국제기구가 실제로 함께 일할 수 있는 상설 협업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둘째, 국내 기업과 대학, 연구기관, 지방정부가 참여하는 개방형 생태계를 설계해야 합니다. 셋째, AI의 혜택을 글로벌 사우스와 취약계층까지 확장하는 실증사업을 조기에 보여줘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한국에 와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공간·예산·제도·프로그램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번 협력이 외교 뉴스에서 끝나지 않고, 한국의 미래 먹거리이자 국제적 신뢰 자산으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이번 제네바 성과의 진짜 의미는 한국이 AI를 통해 더 부자가 되느냐에만 있지 않습니다.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한국이 세계가 필요로 하는 공공적 기술 질서를 제안할 수 있는가. 만약 그 답이 그렇다 라면, 이번 서명은 단순한 협력 의향서가 아니라 한국 외교와 산업정책, 그리고 국가 비전이 만나는 역사적 전환점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한국이 앞으로 만들어야 할 것은 AI 강국이라는 명함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의 존엄과 공공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설계하는 나라라는 신뢰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아시아의 제네바를 말할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DMZ를 대한민국 공공지능의 출발점으로

DMZ에서 공공지능을 말한다는 것은 미래를 미화하자는 제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가장 엄격한 기준을 세우자는 약속입니다. 전쟁의 기억, 안보의 긴장, 생태의 섬세함, 접근성의 불균형이 교차하는 이곳에서조차 사람의 존엄과 공동체의 안전을 지키는 기술만이 공공의 이름으로 허용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진정한 AI 강국이 되고자 한다면, 그 척도는 더 큰 모델, 더 빠른 연산, 더 많은 자본에만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삶을 먼저 보호하는가, 누구에게 먼저 기회를 여는가, 어떤 위험을 먼저 통제하는가가 대한민국 AI의 수준을 결정할 것입니다.그래서 파주 DMZ는 단지 상징적인 장소가 아니라 한국형 공공지능의 철학과 원칙을 세우는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기억하는 땅에서 평화를 설계하겠습니다. 단절의 경계에서 연결의 기술을 만들겠습니다. 배제의 공간에서 모두를 위한 접근성을 실현하겠습니다. 산업 AI를 넘어 공공 AI로, 경쟁의 AI를 넘어 책임의 AI로, 기술의 성장을 넘어 공동체의 신뢰로 나아가겠습니다. DMZ를 대한민국 공공지능의 출발점으로 삼겠습니다. 그리고 그 첫 문장을, 사람을 지키는 기술로 시작하겠습니다.
조선규 | 칼럼니스트

35여 년간 교육과 기업 경영, 그리고 지역 사회 발전의 현장에서 사람과 함께 성장해왔다. “삶의 문제는 결국 사람의 문제”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교육을 통해 변화를 만들고, 기업을 통해 길을 열었으며, 현재는 사회 곳곳의 다양한 문제를 함께 풀어가며 더 따뜻하고 공정한 미래를 그려가고 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