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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단상] 고장 난 컴퓨터가 가르쳐 준 것

임만택 전문 기자
입력

2026.08.05. 영화 ‘오딧세이’ 개방 첫날 관람하고 집으로 돌아와 평소처럼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전원선과 연결 장치를 다시 확인하고 여러 방법으로 부팅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ChatGPT 이미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외출하기 전 컴퓨터를 정상적으로 종료하지 않고 절전 상태로 둔 것이 원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원인을 추측해 보아도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다행히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오래된 컴퓨터 수리점이 있었다. 한여름 폭염 속에서 무거운 컴퓨터 본체를 들고 수리점을 찾아가 점검을 의뢰했다. 수리점 대표는 기기를 이용해 몇 가지를 확인한 뒤 “마더보드가 고장 났다”고 말했다.
 

현재는 맞는 부품이 없으니 다음 날 부품을 구해 수리해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또다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마더보드를 교체하는 비용도 문제였지만, 더 큰 걱정은 컴퓨터 안에 저장된 프로그램과 데이터였다. 마더보드를 교체한 뒤 운영체제와 각종 프로그램을 다시 설치해야 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C드라이브를 포맷하면서 중요한 자료들이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컴퓨터 한 대가 고장 났을 뿐인데, 그 안에는 오랜 시간 쌓아 온 문서와 사진, 업무 자료와 각종 기록이 들어 있었다. 기계의 고장은 단순히 부품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축적해 온 시간과 기억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난감한 마음으로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들은 아들은 컴퓨터를 수리점에 맡기지 말고 일단 다시 가져오라고 했다. 자신이 마더보드를 구해 다음 날 집으로 와서 직접 교체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아들은 경기도 광주까지 가서 어렵게 마더보드를 구해 왔다. 최근에는 반도체와 컴퓨터 부품 가격이 오르고 오래된 기종에 맞는 부품은 매물도 많지 않아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다음 날 아들과 늦은 아침 식사를 한 뒤 컴퓨터 점검을 시작했다. 아들은 본체를 분해하고 고장 났다는 마더보드를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더보드에 장착된 작은 배터리를 먼저 교체해 보자고 했다.
 

배터리를 교체한 뒤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멈춰 있던 쿨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컴퓨터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결국 문제의 원인은 마더보드 전체의 고장이 아니라 작은 배터리의 방전이었다. 마더보드를 교체할 필요도 없었고, 컴퓨터를 포맷하거나 프로그램을 다시 설치할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걱정했던 데이터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큰 돌덩이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비용을 아낀 것도 다행이었지만, 그보다 각종 프로그램을 다시 설치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소중한 자료를 잃을 수 있다는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더 감사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20년 이상 같은 자리에서 컴퓨터 수리점을 운영해 온 대표는 정말 작은 배터리의 문제를 알지 못했던 것일까. 물론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고장의 원인을 정확히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마더보드 배터리가 방전됐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컴퓨터 전원이 완전히 들어오지 않는 경우만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가장 비용이 적게 들고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는 원인부터 점검하지 않은 채 곧바로 마더보드 고장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설마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전문가의 말이라 하더라도 무조건 믿기보다는 한 번쯤 다른 가능성을 살펴보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당황하기보다 가장 기본적인 원인부터 차근차근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문제가 커 보이면 원인도 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거대한 문제처럼 보이는 상황도 때로는 아주 작은 부품 하나에서 시작된다.
 

둘째, 전문가의 판단도 언제나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전문적인 경험과 지식은 존중해야 하지만, 중요한 결정일수록 한 사람의 진단만 듣고 서둘러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다른 의견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특히 큰 비용이 들거나 되돌리기 어려운 작업이라면 ‘두 번째 점검’은 선택이 아니라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
 

셋째, 컴퓨터 데이터는 평소에 반드시 백업해야 한다. 이번에는 다행히 자료를 잃지 않았지만, 언제든 저장장치가 고장 나거나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중요한 자료를 컴퓨터 한 곳에만 저장해 두는 것은 소중한 기록을 위험에 맡기는 일과 같다. 외장 저장장치나 클라우드 등을 활용해 정기적으로 백업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넷째, 가족은 위기의 순간에 가장 가까운 해결책이 되어 준다. 먼 곳까지 부품을 구하러 다니고, 직접 컴퓨터를 분해해 문제를 해결해 준 아들의 수고가 고마웠다. 컴퓨터가 다시 작동한 것보다 아들이 보여 준 마음이 더 크게 남았다.
 

우리는 일상에서 작은 문제가 생기면 쉽게 불안해하고 최악의 상황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해결의 실마리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다.
 

고장 난 컴퓨터는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얻은 교훈은 컴퓨터 안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저장되었다.
 

당황할수록 기본으로 돌아갈 것, 중요한 결정은 한 번 더 확인할 것, 소중한 것은 평소에 지킬 것, 그리고 곁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 감사할 것.


작은 배터리 하나가 꺼뜨렸던 컴퓨터의 전원은 다시 켜졌다. 그와 함께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의 지혜와 감사의 마음도 다시 켜졌다.

임만택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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