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음악
[지영순의 삼삼한 음악이야기]

[지영순의 삼삼한 음악이야기] 특별기획 《바이로이트에서 만난 바그너》 ⑥

소프라노 지영순 전문위원
입력
바그너의 도시를 잠시 떠나, 천 년의 밤베르크를 걷다

지영순의 삼삼한 음악이야기

특별기획 《바이로이트에서 만난 바그너》 ⑥

 

바그너의 도시를 잠시 떠나, 천 년의 밤베르크를 걷다

대성당의 종탑에서 레그니츠강까지… 음악가의 눈으로 만난 ‘도시라는 예술작품’

밤베르크 대성당과 도시 모형이 함께 보이는 사진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따라가던 여정 중, 하루는 잠시 도시를 벗어나 밤베르크(Bamberg)로 향했다.

그런데 이곳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음악은 꼭 극장 안에서만 만나는 것이 아니구나.’

 

오래된 성당의 종탑과 돌길, 화려한 벽화가 남은 건물, 레그니츠강을 따라 이어지는 풍경까지. 밤베르크는 도시 전체가 한 편의 오래된 음악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바그너를 만나기 위해 시작한 여행이었지만, 이날만큼은 악보를 잠시 덮고 천 년의 시간이 만든 또 하나의 예술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1. 네 개의 첨탑 아래, 천 년의 역사를 만나다

밤베르크성당 전경 사진

밤베르크의 첫인상을 압도하는 것은 단연 밤베르크 대성당(Bamberger Dom)이다.

밤베르크는 일곱 언덕 위에 형성되어 ‘프랑켄의 로마’라고도 불리는데, 그 중심인 대성당은 하인리히 2세가 1007년 밤베르크 교구를 세우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네 개의 첨탑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모습은 멀리서도 도시의 중심을 알린다.

 

성당에는 하인리히 2세와 쿠니군데 황후와 관련된 유산을 비롯해 교황 클레멘스 2세의 묘, 정체가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유명한 조각상 ‘밤베르크 기사(Bamberger Reiter)’가 남아 있다.

그 거대한 건축물 앞에 서 있으니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을 지나갔을까.

음악가인 나에게 오래된 성당은 거대한 악보처럼 보인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고, 다음 세대가 다시 읽으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2. 돌담 앞에서 만난 ‘과거와 오늘’

구 궁정의 오래된 돌담과 조각상 사진
딸과 유모차가 함께 나온 돌담 사진

대성당 옆에는 구 궁정(Alte Hofhaltung)이 자리한다.

이곳은 과거 황제와 주교의 공간이었으며, 1007년 교구가 세워진 뒤 주교의 거처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16세기 독일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이 들어섰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목조 건물이 둘러싼 고풍스러운 안뜰을 만나게 된다.

 

오랜 세월을 견딘 돌담 앞을 딸과 손자가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순간 재미있는 대비가 보였다.

수백 년 된 돌벽과 이제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한 어린아이.

 

과거와 미래가 한 화면 안에 들어온 것이다.

여행이란 어쩌면 오래된 것을 보는 일이 아니라, 오래된 것 앞에서 지금의 나와 우리를 다시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3. 골목을 돌 때마다 장면이 바뀌는 도시

초록색 창문이 인상적인 목조 건물 사진

밤베르크에서는 목적지를 향해 빨리 걸으면 손해이다.

좁은 골목을 하나 돌아설 때마다 중세풍 목조주택이 나타나고, 조금 더 걸으면 바로크 건물이 등장한다. 오래된 창문과 형형색색의 외벽, 작은 상점과 카페가 이어진다.

 

밤베르크 구시가지는 중세에서 바로크 시대에 이르는 수많은 역사적 건축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시로서 오늘날에도 그 옛 도시 구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유명 관광지만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골목 자체가 관광지이고, 걷는 것 자체가 여행이다.

 

4. 건물에 그림을 그렸다고? 밤베르크의 반전

화려한 벽화 건물앞에서의 사위사진

걷다 보면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화려한 건축물을 만난다.

특히 밤베르크의 구 시청사(Altes Rathaus)는 더욱 흥미롭다. 레그니츠강 가운데 인공섬 위에 세워진 건물로, 외벽을 장식한 화려한 프레스코화가 유명하다.

 

전설에 따르면 주교가 시민들에게 시청사를 지을 땅을 내주지 않자 시민들이 강에 말뚝을 박아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직접 시청사를 세웠다고 한다. 사실과 전설의 경계에 있는 이야기지만, 밤베르크 시민들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이다.

 

가까이 보면 그림 일부가 실제 조각처럼 벽 밖으로 튀어나와 있어 보는 재미도 있다.

엄숙한 대성당과 이런 재치 있는 건축이 한 도시에 함께 있다는 것이 밤베르크의 매력이다.

 

5. 레그니츠강 앞에서 도시의 템포가 느려지다

레그니츠강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언덕과 골목을 지나 강가로 내려오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레그니츠(Regnitz)강이 밤베르크 한가운데를 유유히 흐르고, 강변을 따라 오래된 집과 자전거, 작은 배들이 일상의 풍경을 만든다.

 

밤베르크는 언덕의 도시, 섬의 도시, 시장원예의 도시라는 서로 다른 역사적 공간이 어우러져 형성된 곳이다.

성당 앞에서는 천 년의 역사를 생각했다면 강가에서는 그저 천천히 걷고 싶어진다.

음악에도 쉼표가 필요하듯 여행에도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

레그니츠강변의 동화같이 예쁜  집 배경 사진

강을 바라보며 잠시 서 있으니, 여행에서 가장 좋은 순간은 꼭 유명한 것을 보고 있을 때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6. 결국 가장 오래 남는 것은 ‘함께’였던 순간

야외 식당에서 딸·사위·손자와 함께한 사진

많이 걸었으니 이제 먹을 시간이다.

야외 식당에 앉아 메뉴를 들여다보는 딸과 사위, 그 사이에 앉아 있는 손자를 바라보니 거창한 관광 명소와는 또 다른 여행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밤베르크 여행의 마지막에는 역시 달콤한 것이 필요했다.

세 가족이 젤라토를 들고 웃는 사진

젤라토 하나씩을 손에 들고 웃었다.

어쩌면 몇 년이 흐른 뒤 밤베르크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대성당의 연대나 건축양식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날 우리 같이 아이스크림 먹었지.”

바로 이런 한마디일 것이다.

바그너를 찾아온 여행에서, 또 다른 음악을 듣다

바이로이트에서는 바그너의 거대한 음악을 들었다.

그러나 밤베르크에서는 조금 다른 음악을 들었다.

 

성당의 종탑과 오래된 돌벽, 구불구불한 골목과 레그니츠강, 그리고 가족이 함께 걷는 발걸음이 만들어내는 조용한 음악이었다.

음악은 반드시 무대 위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한 도시가 오랜 시간을 견디며 만들어낸 풍경에도 리듬이 있고, 사람들의 삶에도 선율이 있다.

그래서 이번 밤베르크 여행은 《바이로이트에서 만난 바그너》라는 여정에서 잠시 벗어난 하루이면서, 오히려 내가 ‘음악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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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라노 지영순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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