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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바다를 건너 돌아온 돌사람들, 천년의 침묵 속에서 역사를 만나다

임만택 전문 기자
입력
성북시티투어로 찾은 우리옛돌박물관, 가을 길목에서 마주한 민족의 기억과 문화유산의 귀환 고(故) 천신일 세중그룹 회장이 평생 일궈낸 옛돌의 공간… 빼앗긴 문화유산을 되찾은 집념과 우리 선조들의 삶을 되새기다

2026년 10월 10일, 가을이 깊어가는 문턱에서 서울 성북동으로 향했다. 성북구청과 로망스투어가 운영하는 '2026 성북시티투어'에 참여해 찾아간 곳은 서울 성북구 대사관로13길에 자리한 우리옛돌박물관이었다.

서울 성북동에 자리한 우리옛돌박물관 입구. 옛돌의 역사와 현대적 박물관 건축이 조화를 이룬다.

푸른 하늘 아래 소나무가 있는 산책로에는 가을빛이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가지마다 물들기 시작한 단풍과 길 양옆에 늘어선 돌사람들은 오랜 세월을 지나온 역사의 한 장면처럼 다가왔다.

 

그저 오래된 석조유물들을 감상하는 박물관 방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사람들 하나하나에 얽힌 사연을 알아갈수록 이번 탐방은 단순한 문화유산 관람을 넘어 우리 민족이 겪어온 아픔과 문화재를 지켜낸 사람들의 집념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특히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나 고국으로 돌아온 석상들 앞에서는 한동안 발걸음을 옮기기 어려웠다. 말하지 못하는 돌이지만, 그 침묵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바다를 건너 돌아온 돌사람들, 그 앞에서 멈춘 발걸음

 

우리옛돌박물관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준 것은 일본에서 환수한 문인석과 장군석, 동자석의 이야기였다.

야외 정원의 석호상. 가을빛이 물들기 시작한 산책로와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연출한다.

문인석은 본래 무덤 앞에서 망자의 안녕을 기원하고 능묘를 지키던 석상이다. 관복을 갖춰 입고 두 손으로 홀을 받쳐 든 모습에는 죽은 이를 공경하고 조상의 평안을 기원했던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가 담겨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석조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됐다. 오랫동안 제자리를 지켜온 돌사람들은 낯선 땅으로 옮겨졌고, 그들의 고향에는 빈자리만 남았다.

소나무 아래 나란히 자리한 석상들. 투박하면서도 친근한 표정에서 우리 전통 석조예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박물관 공식 자료에 따르면, 천신일 회장은 2000년 일본인 수집가 구사카 마모루가 다수의 한국 석조유물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해 설득을 거듭한 끝에 2001년 문인석과 장군석, 동자석 등 석조문화재 70점을 국내로 환수했다.

 

이는 단순히 오래된 돌조각을 구입하거나 옮겨온 일이 아니었다. 타국에 흩어져 있던 우리 문화유산을 다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한 일이었다.

 

돌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일본 땅에서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냈을까. 자신들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올 날이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물론 돌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돌사람의 표정과 거친 표면에 남은 시간의 흔적은 잃어버린 역사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제강점기 36년은 단순히 국권을 빼앗겼던 시기가 아니었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정신적 자산까지 위협받았던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러한 역사를 생각하면 바다를 건너 돌아온 석상들은 단순한 전시물이 아니라 민족의 기억을 되찾았다는 상징처럼 다가온다.

 

고국으로 돌아온 돌사람들이 오늘날 우리 앞에 조용히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했다.

 

한 사람의 집념이 일궈낸 우리옛돌박물관

우리옛돌박물관 전경

우리옛돌박물관은 고(故) 천신일 세중그룹 회장이 오랜 세월 수집하고 보존해 온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탄생한 공간이다. 천 회장은 1978년부터 석조유물을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2000년 경기도 용인에 세중옛돌박물관을 개관했다. 이후 2015년 서울 성북동에 우리옛돌박물관을 열어 오랜 세월 모아 온 석조유물을 대중에게 선보였다.

 

공식 연혁에는 2001년 일본 유출 석조문화재 70점 환수, 2002년 국립민속박물관 석조유물 기증, 2007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석조유물 영구대여, 2019년 일본 유출 문화재 추가 환수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박물관은 한 기업인이 오랜 시간 품어온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이 어떻게 사회적 자산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 전통 석조유물은 궁궐이나 사찰의 화려한 문화재와 달리 오랫동안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름 없는 석공들이 다듬은 돌사람, 마을을 지키던 벅수, 가족의 행복을 기원하던 동자석은 민중의 생활 속에서 형성된 문화유산이었다.

 

천 회장이 주목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돌의 소박한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선조들의 숨결이었을 것이다.

 

박물관을 걷다 보면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 무엇인가를 수집한다는 일이 단순한 취미나 소유욕만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이 흐를수록 가치가 잊히는 것들을 찾아내고 보존하며, 마침내 많은 사람이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낸 노력에는 문화유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었을 것이다.

 

기업인의 삶을 넘어 문화유산의 보존과 환수에 힘을 기울였던 천 회장의 발자취가 이곳에 남아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돌사람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 사람이 품었던 뜻이 박물관이라는 공간을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돌사람의 얼굴에서 만난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염원

 

박물관을 돌아보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돌사람들의 다양한 표정이었다. 어떤 석상은 근엄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고, 또 어떤 석상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문인석, 무기를 든 장군석, 익살스러운 얼굴의 동자석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우리옛돌박물관 실내 전시관에 늘어선 석조유물들. 각기 다른 표정의 돌사람들이 선조들의 삶과 염원을 전하고 있다.

전시관에서 만난 수많은 동자석은 특히 친근하게 다가왔다.

 

동자석은 단순히 어린아이를 형상화한 조각이 아니다. 때로는 망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때로는 후손들의 행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상징물이었다. 박물관의 동자관은 '기원의 언덕, 소원을 품다'라는 주제로 구성돼 있으며, 벅수관에서는 한국인의 다양한 희로애락을 담은 석조유물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석상들을 바라보면 우리 선조들이 돌에 새기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인물의 모습이 아니라 삶의 소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픈 사람이 건강해지기를, 떠난 이가 평안하기를, 자손들이 복을 누리기를 바랐던 마음은 오늘날 우리가 품고 살아가는 소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돌은 차갑지만, 그 안에 새겨진 마음은 따뜻했다.

 

수백 년 전 이름 모를 석공이 정성껏 다듬었을 얼굴을 마주하며, 예술이란 반드시 화려하거나 거창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진실한 마음을 담아낸 것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시대를 초월하는 예술이 될 수 있다.

 

흥인군 이최응 묘의 석조유물, 역사의 흔적을 따라

 

야외 전시 공간에서 마주한 '흥인군 이최응 묘의 석조유물'도 발길을 붙잡았다.

흥인군 이최응 묘의 석조유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 소재 흥인군 이최응(1815~1882)의 무덤에 놓였던 문인석 신도비, 망주석이다.
이최응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양백, 호는 산향이다. 남연군 이구의 셋째 아들이고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으로 흥인군에 봉해졌으며 민씨정권의 주요 인물로서 아우인 흥선대원군과는 사이가 안좋았다.
이 문인석은 매우 세련되고 날렵한 동작을 취하고 있으며, 비교적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신도비 역시 크고 웅장하게 제작되었다. 이렇듯 왕족의 무덤은 일반 사대부 묘보다는 훨씬 더 격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외형적인 규모에서부터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흥인군 이최응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으로, 조선 후기 격변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안내판에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 소재 흥인군 묘에서 옮겨온 문인석과 신도비, 망주석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눈앞의 문인석은 단정하고 절제된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두 손을 모은 자세와 세월의 흔적이 남은 얼굴에서는 조선 후기 석조 조각의 특징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러한 유물들은 한 개인의 무덤을 장식했던 석조물이면서 동시에 당대의 장례문화와 신분질서, 조형 감각을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이기도 하다. 석상의 얼굴에는 오랜 풍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시간은 돌의 표면을 마모시켰지만, 그 안에 담긴 역사적 의미까지 지우지는 못했다.

 

우리가 문화유산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문화유산은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귀중한 것이 아니다. 그 안에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과 생각, 사회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가을빛 아래 펼쳐진 돌의 정원, 자연과 예술이 만나는 공간

 

실내 전시관을 나와 야외 정원에 들어서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푸른 하늘과 소나무,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나무들 사이로 수많은 석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길 양쪽에는 커다란 석수들이 마주 보고 있었고, 그 뒤편으로는 문인석과 동자석, 석등과 불상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소나무 아래 나란히 자리한 석상들. 친근한 표정에서 우리 전통 석조예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길을 지키듯 앉아 있는 거대한 석수들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둥글고 묵직한 몸체, 거친 돌의 질감, 세월이 지나도 당당함을 잃지 않은 모습에서는 우리 전통 석조예술 특유의 힘과 해학이 느껴졌다.

 

서양의 조각이 인체의 비례와 세밀한 묘사를 중시하는 경우가 많다면, 우리 옛 석조 조각에서는 다소 투박하지만 친근한 표정과 자연스러운 조형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모습은 정교함을 넘어 인간적인 따뜻함을 전한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석상. 단정한 얼굴과 절제된 조형미가 돋보인다.

야외 정원 한편에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커다란 석상도 자리하고 있었다.

 

그 앞에 서니 인간의 삶이 얼마나 짧고, 우리가 남기는 문화의 흔적은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우리옛돌박물관이 지닌 특별한 아름다움은 이처럼 자연과 조각, 역사와 휴식이 하나의 공간에서 어우러진다는 점이다. 박물관의 야외 전시 공간은 '염화미소', '무인시대', '일본 환수 문인석', '오감만족' 등 여러 주제로 구성돼 있다.

염화미소"꽃을 들고 미소를 띠다"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을 뜻한다.
“석가가 연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이자 모인 사람들중 가섭이라는 제자만이 그 참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 이에 석가는 가섭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덕)과 열반묘심(涅槃妙心 번뇌를 벗어나 진리에 도달한 마음), 실상무상(實相無相 불변의 진리), 미묘법문(微妙法門 진리를 깨닫는 마음) 등의 불교 진리를 전해 주었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듯 돌사람들을 바라볼 수도 있고, 숲길을 걸으며 그들이 지나온 시간을 상상할 수도 있다. 10월의 햇살은 돌사람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뎌온 석상들이 가을 햇살 아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듯했다.

그 풍경은 조용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남겼다. 

 

문화유산 환수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과제다

 

이번 탐방에서 가장 오래도록 마음에 남은 것은 문화유산을 되찾는 일이 갖는 의미였다.

 

우리옛돌박물관의 역사를 살펴보면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가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다. 2001년의 환수에 이어 2019년에도 일본에 유출됐던 장군석 2점, 장명등 2점, 비석받침석 2점이 환수됐다. 이는 문화유산 환수가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과 실천을 필요로 하는 일임을 보여준다.

 

문화재가 해외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반출 과정을 동일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개별 유물의 이동 경위와 소유권, 반환의 법적·역사적 근거를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불법 반출과 약탈로 나라 밖에 흩어진 문화유산을 되찾는 일은 분명 우리 사회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과제다.

 

더욱 중요한 것은 환수 이후의 일이다.

 

되찾아온 문화유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연구하며, 다음 세대에 어떤 이야기를 전해줄 것인가. 돌사람들의 귀환이 단순한 소장품의 이동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옛돌박물관은 문화유산을 보관하는 장소를 넘어 역사교육의 현장이자 문화적 기억을 이어주는 공간이다. 천신일 회장은 2026년 3월 17일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그가 오랜 세월 이어온 석조유물 수집과 환수 활동은 우리옛돌박물관이라는 문화적 유산으로 남았다.

 

그가 일궈놓은 공간에서 오늘날 많은 사람이 돌사람을 만나고, 잊혀가는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사실은 뜻깊다.

 

천년을 견딘 돌사람들이 우리에게 남긴 이야기

 

박물관을 나서는 길,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푸른 소나무 사이로 돌사람들이 서 있었고, 가을 햇살은 그들의 어깨 위에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지켜온 돌사람들. 그들 가운데는 고향을 떠나 먼 바다를 건넜다가 돌아온 이들도 있고, 이름 모를 마을과 무덤을 지키다가 이곳에 모인 이들도 있다. 어느 하나 가벼운 사연이 없을 것이다.

 

이번 성북시티투어는 서울의 문화명소를 둘러보는 관광 일정이었지만, 내게는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가 잊고 살아온 역사와 선조들의 삶, 그리고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의 이야기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지켜야 할 기억이다. 그 기억은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며, 다음 세대에 온전히 전해주어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우리옛돌박물관의 돌사람들은 오늘도 말없이 서 있다. 하지만 그 침묵이 전하는 메시지는 결코 작지 않다.

 

나라를 잃었던 아픔을 잊지 말라는 것,
잃어버린 문화유산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라는 것, 
그리고 오랜 세월 이어온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소중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가을이 오는 문턱에서 만난 돌사람들.

그들은 내게 천년의 시간을 건너온 역사의 증언자이자,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얼굴로 남았다.


돌은 침묵하지만 역사는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


성북동의 가을은 그렇게,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글 ㅣ 임만택 한국아트넷뉴스 대표

우리옛돌박물관 소개

우리옛돌박물관은 우리 민족의 삶과 애환, 염원이 담긴 전통 석조유물의 예술적 가치를 알리고 한국 문화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기 위해 설립된 석조유물 전문박물관이다. 40여 년간 국내외에 흩어진 한국 석조유물을 수집해 온 고(故) 천신일 세중그룹 회장이 2000년 경기도 용인에 세중옛돌박물관을 개관한 데 이어, 2015년 서울 성북동에 우리옛돌박물관으로 재개관했다.

 

북악산과 한양도성 사이에 자리한 박물관은 약 5,500평의 부지와 1,000평 규모의 건물에 석조유물 1,250점, 전통 자수 280여 점, 근현대 회화 1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일본에서 환수한 문화재를 비롯해 문인석, 장군석, 동자석, 벅수, 석탑, 불상 등 다양한 석조유물을 통해 선조들의 삶과 지혜, 수복강녕(壽福康寧)을 기원했던 정신세계를 조명한다.

 

우리옛돌박물관은 전통과 현대, 자연과 예술이 공존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해외 문화재 환수와 석조유물 연구, 학술교류 및 신진작가 지원에도 힘쓰고 있다. '산, 바람, 1,000개의 돌, 1,000개의 이야기'가 어우러진 우리옛돌박물관은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과 한국 전통예술의 아름다움을 되새기는 특별한 공간이다.

 

우리옛돌박물관 관람 안내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대사관로13길 66

  • 관람시간: 평일 10:00~17:00, 주말·공휴일 10:00~18:00

  •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별도 공지 임시 휴관일

  • 전화: 02-986-1001

  • 공식 홈페이지: 우리옛돌박물관

임만택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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