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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 Focus]

[박성남 평론] 귀환달의 고고학과 케노시스적 환대: 박성남의 '트·터·탈 ART'에 내재된 포월의 세계

임만택 전문 기자
입력

귀환달, 비움의 묵시록


— 작가 박성남 (朴城)
 

해와 달과 별, 그리고 푸른 지구여
그것은 창조의 태초부터 흐르던
성부와 성자가 성령의 거룩한 삼위(三位)였던가.
어머니의 태줄을 끊고 지상으로 추락한 인간이
기우는 달의 삭막함 속에서 방황할 때,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몸을 찢어 수직으로 갈라진 ‘귀환달’이 되었다.


선조들이 빚어낸 백자 달항아리,
그 둥근 원형의 중심을 수직으로 과감히 썰어낼 때
단면의 틈새로 흘러나오는 신비한 암호여.
움푹 함몰된 모반(母斑)은 상처가 아니라
잃어버린 자궁의 영토, 고향으로 다시 이어지는
새로운 태줄의 잇기였다.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귀소본능, 노스토스(Nostos).
갓 잡아 올린 물고기의 일대길처럼
오직 하나의 방향만을 향해 나아가는 생의 엄숙함이여.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탐심의 세상,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들끓는 대지 위에서
우리가 움켜쥐려던 소유의 ‘갈래’와 ‘버릇’은
마침내 소진되고 마멸되어 한 줌의 먼지가 된다.


참빛을 잃어버린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징후들,
그 무질서한 파편들을 하나의 용광로에 융복합하여
정반합의 변증법으로 녹여내는 융합의 캔버스여.
이제 주체는 자신을 철저히 비워내는 케노시스(Kenosis)의 제단 위에 선다.
 

완고한 경계를 깨부수어 통로를 ‘트’고,
내 안의 아집을 긁어내어 타자가 머물 ‘터’를 가꾸며,
소유의 감옥이었던 집착의 껍질을 벗겨내는 ‘탈’의 몸짓.
이 트·터·탈의 ART는 소내(消內)의 소멸 과정을 지나
마침내 차원을 넘어서는 포월(超越)의 세계로 도약한다.
 

움직임 속에 깃든 고요함, 정중동(靜中動)의 거룩한 함의 속에서
기어이 쏟아지는 어둠을 거스르는 역리(逆理)의 빛이여.
달항아리의 갈라진 틈은 이제 옛 선조들의 달마중을 넘어
이 땅의 야윈 인간을 마중하고 상처 입은 자연을 마중하는
지상에서 가장 넓고 고요한 포월의 환대가 된다.

Kenosis ㅡ(트);귀소자

[철학적 평론] 귀환달의 고고학과 케노시스적 환대: 박성남의 '트·터·탈 ART'에 내재

된 포월의 세계
 

작가: 朴城(박성남)
 

1. 우주적 삼위일체와 귀환달의 메타포


인간 실존의 비극은 분리에서 출발한다.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완벽한 존재(Being)의 영토에서 잘려 나가는 ‘태줄의 비명’은 주체에게 영원히 메울 수 없는 근원적 결핍의 구멍을 남긴다. 서양 철학이 이 결핍을 외부의 객체를 소유(Having)함으로써 채우려 했다면, 나의 예술은 상실의 원형을 찾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귀소본능, 즉 ‘노스토스(Nostos)’의 고고학을 수행한다.
 

나의 화면에서 우주는 거대한 신성(Divinity)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장이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우리가 발을 딛고 역사를 살아가는 지구는 각각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Trinity)적 질서에 대응한다. 이 우주적 질서 속에서 가장 중심적인 메타포로 부각되는 존재가 바로 ‘귀환달’이다. 기우는 달의 주기는 주체가 참빛을 잃어버리고 혼돈과 공허, 흑암의 징후 속에 갇혀버린 말세적 징조를 드러낸다. 달이 완전히 사라지는 달삭(朔)의 공포 속에서, 성자(聖子)인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역사 속으로 하강하여 스스로를 깨뜨린다.
 

나는 이러한 신학적·실존적 사유를 선조들의 유산인 ‘달항아리’를 통해 시각화한다. 본래 달항아리는 상부와 하부를 따로 빚어 하나로 접합하는 포용의 기물이다. 나는 이 둥글고 완벽한 원형의 달항아리를 과감하게 ‘수직으로 썰어내는’ 행위를 감행한다. 이 수직의 절단은 폭력이 아니다. 그것은 닫힌 세계를 열어젖히는 거룩한 절개이며, 그 수직의 단면 틈새에 숨겨진 신비한 신의 암호를 함의하는 예술적 사건이다. 절단된 면에 자리한 ‘움푹 함몰된 모반(母斑)’은 태초에 잘려 나갔던 탯줄을 다시 잇는 영적인 접합점이자, 깨어진 인간이 신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작용한다.
 

2. 탐심의 흑암과 정반합의 융복합(통섭) 

인간이 지상에서 마주하는 가장 큰 유혹은 성서가 경고한 삼대 정욕, 즉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다. 캔버스 위에 투영되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탐심의 세계는 주체로 하여금 본질을 망각하고 소유의 감옥에 갇히게 만든다. 이 탐심의 노예가 된 인간들은 저마다 자신의 상처를 다루기 위해 ‘갈래’를 치고, 그것이 고착화된 ‘버릇’을 형성하며 타인과 대립한다. 그러나 감각적 정욕이 이끄는 삶의 끝은 필연적으로 소진(Burnout)과 마멸(Wear-out)이다. 참빛을 잃어버린 주체의 내면은 창조 이전의 상태인 카오스(Chaos), 즉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징후로 가득 차게 된다.


나는 이러한 파편화된 인간의 비극과 흑암의 징조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정반합(Thesis-Antithesis-Synthesis)의 변증법적 구조 속으로 끌어들여 하나의 거대한 현대적 융복합(통섭)의 예술로 승화시킨다. 정(正)이 태초의 삼위일체적 빛이라면, 반(反)은 탐심으로 인해 혼돈하고 흑암으로 추락한 인간의 실존이다. 나는 이 두 가지 모순된 사태를 캔버스라는 단일한 평면 위에 충돌시키고 융합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합(合), 즉 구원과 환대의 미학을 도출해 낸다. 마치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강력한 귀소본능처럼, 혹은 그물에 걸린 갓 잡아 올린 물고기(갓고기)가 일대길(오직 하나의 외길)을 향해 펄떡이며 나아가듯, 나의 화면은 어둠을 뚫고 빛의 시원으로 돌아가려는 맹렬한 생명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3. 케노시스(Kenosis)와 트·터·탈 ART의 포월적 세계
 

이 정반합의 융복합이 완성되는 메커니즘이 바로 ‘케노시스(Kenosis, 자기 비움)’이다. 빌립보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졌듯이, 나의 예술적 행위는 철저한 자기 해체와 소멸의 과정을 전제한다. 내 안의 가득 찬 탐심과 고집스러운 ‘버릇’을 완전히 비워내지 않고서는 결코 타자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케노시스의 공학은 ‘트’, ‘터’, ‘탈’이라는 구체적인 세 가지 레이어의 ART로 실현된다.

Kenosis ㅡ(트);귀환달

‘트’의 단계: 이는 선을 긋기 이전의 원초적 행위인 ‘긁음’과 연결된다. 두꺼운 마티에르와 물질의 장벽을 서걱거리며 긁어내고 파내는 행위는, 닫힌 주체의 경계를 깨뜨려 외부를 향해 숨통을 ‘트는’ 실존적 투쟁이다. 긁음으로써 주체는 비로소 소유의 폐쇄성에서 벗어난다. 

Kenosis ㅡ(터);귀환달
Kenosisㅡ(터):버릇

‘터’의 단계: 나를 긁어내고 헐어버려 비워진 그 자리는 타자가 와서 편히 쉴 수 있는 광장, 즉 ‘터’가 된다. 나의 영토를 주장하지 않고 독점적 권리를 포기할 때, 화면은 온전히 타인의 상처를 받아내는 환대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Kenosis ㅡ(갈래);자연마중

‘탈’의 단계: 세월의 무게 속에서 나를 규정해 온 완고한 갈래와 이기적인 버릇의 껍질을 완전히 벗겨내는(脫) 탈각의 과정이다. 나를 지배하던 방어기제와 집착에서 해방될 때, 주체는 비로소 순수한 존재의 자유를 얻는다.
 

이 세 가지 단계는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화면 내부에서 끊임없이 서로를 지워나가고 소멸시키는 ‘소내(消內)의 과정’을 겪는다. 나의 흔적이 안으로 소멸해 갈 때, 나의 작품은 물질적 평면을 넘어 차원을 초월하는 ‘포월(包越)의 세계’로 진입한다. 포월이란 단순히 세계를 넘어선다는 의미를 넘어, 온 세상의 모순과 상처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包)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는(越) 예술적 구원의 상태이다.
 

4. 결론: 역리(逆理)의 빛과 인간마중·자연마중의 포월적 환대
 

나의 예술적 여정이 당도한 최종적 종착지는 탯줄의 결핍을 넘어서는 영적 복원이자, 우주적 스케일로 확장된 마중의 대제전이다. 

Kenosis ㅡ(탈);인간마중

나는 어둠이 깊어질 때 비로소 그 어둠을 뚫고 솟구치는 ‘역리(逆理)의 빛’을 캔버스 위에 소환한다. 순행하는 세상의 탐심과 정욕이 영혼을 흑암과 공허 속으로 침전시킬 때, 캔버스를 긁어내고 비워내는 케노시스의 행위는 세상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르는 거룩한 거역, 즉 역리의 빛이 된다. 이 빛은 스스로 낮아짐으로써 도달하는 가장 높은 차원의 포월적 광채이다.
 

이 역리의 빛이 가리키는 곳에서, 옛 선조들이 행하던 소박한 기원의 의식인 ‘달마중’은 나의 붓끝을 거치며 경이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맞이한다. 이제 나의 화면은 단지 하늘에 뜬 대상을 바라보는 평면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수직으로 갈라 타자를 향해 온몸을 열어젖힌 귀환달로서, 다가오는 대상을 마주 안는 ‘인간마중’이자, 상처 입고 신음하는 우주적 생명을 품어 안는 ‘자연마중’의 장이 된다.
 

탐심으로 인해 ‘갈래’가 찢어지고 ‘버릇’이 완고하게 굳어버린 인간 실존을 마중하고,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참빛을 잃고 비명 지르는 자연의 궤적까지 고스란히 마중하는 일. 이 지극한 마중은 대상을 나의 기준대로 재단하거나 소유하려 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모양 그대로 용납하는 ‘그려러니’의 무조건적 환대를 통해 완결된다.
 

결국 나의 ‘트·터·탈 ART’는 탯줄의 비명이라는 근원적 상실에서 출발하여, 스스로의 영토를 소멸시키는 소내의 고통을 통과한 뒤, 마침내 도달한 포월의 세계다. 수직으로 썰어낸 달항아리의 빈 경계는 인간과 자연, 주체와 타자가 지닌 모든 상처와 결핍을 역리의 빛으로 따스하게 감싸 안으며 기어이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는 지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운 환대의 품인 것이다.
글 ㅣ 박성남 화가

 

박성남 화가는 1966년 경복궁에서 열린 제15회 국전을 시작으로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며 꾸준한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2026년 서울 DB금융센터에서 개최한 《두 세대 간의 대화》를 비롯해 총 28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아트부스 서울(Art Booth Seoul)’ 전속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박수근미술연구소 이사, 카네기 Lee재단 미술분과 고문, 서울한강비엔날레 자문위원, 한국평화연구원 고문, 한국국토해양미술대전 고문을 맡고 있다. 또한 호주 크리스찬리뷰 아트디렉터로 활동하며 국내외 미술문화 발전과 교류에 힘쓰고 있다.

임만택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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