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다림의 꽃, 능소화』… 올림픽공원에서 만난 여름의 그리움

오랜만에 송파둘레길 성내천길을 따라 올림픽공원을 다녀왔다. 어제 내린 비로 기온이 내려간 탓인지 그리 덥지는 않다. 약간 흐린 듯한 하늘 아래, 초록으로 무성해진 나무 사이사이에서 주황빛 꽃들이 환하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한여름의 문턱에 피어나는 꽃, 능소화였다.

담장을 타고 오르고, 나무를 감싸 안으며 흐드러지게 피어난 능소화는 늘 그렇듯 보는 순간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가까이 다가가 꽃을 들여다보면 붉은빛과 주황빛이 섞인 꽃잎이 나팔처럼 활짝 열려 있다. 마치 누군가를 부르는 듯, 먼 곳의 소식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다.
어릴 적에는 그저 예쁜 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능소화에는 꽃보다 더 깊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옛날 중국 궁궐에 소화라는 아름다운 궁녀가 있었다고 한다. 임금의 총애를 받아 단 하루를 함께했지만, 그 후 임금은 다시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 소화는 혹시 오늘은 오시지 않을까, 내일은 기억해 주시지 않을까 하며 궁궐 깊숙한 곳에서 긴 기다림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발자국 소리에도 가슴이 뛰고,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에도 눈길을 보내며 기다렸지만 끝내 임금은 오지 않았다. 결국 기다림에 지친 소화는 스스로 세상을 떠나면서 대궐 담장 아래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혹시라도 임금이 지나가면 가장 먼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넋이 꽃이 되어 피어난 것이 바로 능소화라고 전해진다.

그래서일까.
능소화는 담장을 넘어 하늘을 향해 자라고, 꽃은 나팔처럼 크게 벌려 먼 곳의 소리를 들으려 하는 듯하다.
전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꽃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우리의 마음이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고, 이미 떠나보낸 추억일 수도 있다. 젊은 날의 꿈일 수도 있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 부모님일 수도 있다.
능소화를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사람은 결국 사랑하며 기다리는 존재라는 것을. 기다림은 때로 아프고, 외롭고, 허망하다. 하지만 기다려 본 사람만이 그리움의 깊이를 알고, 사랑의 소중함을 안다.

오늘 올림픽공원의 능소화는 유난히 아름다웠다. 초록 숲 사이에서 수백 송이의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오랜 세월 품어온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주는 듯했다. 꽃은 매년 피고 지지만, 사람의 시간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꽃을 만날 수 있을 때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루지 말고 안부를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능소화는 화려하지만 결코 요란하지 않다. 묵묵히 기다리다가 여름이 되면 자신을 드러내고, 아무 말 없이 다시 계절 속으로 사라진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능소화와 닮아 있는지 모른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살고,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한 송이 꽃으로 남게 된다.

오늘 올림픽공원에서 만난 능소화는, 단순히 아름다운 여름꽃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과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편지였다. 그리고 나는 꽃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오래전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았다.
꽃은 피어도 말이 없지만, 그 침묵 속에는 수많은 사연과 기다림이 숨어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피어난 능소화처럼, 우리 마음속의 그리움 또한 계절을 따라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