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해설] 권달웅의 "고삐"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12]
고삐
권달웅
아슴푸레해지는 해거름이면 넓은 들녘에는 워낭소리가 퍼졌다. 해종일 부리는 대로 묵묵히 일만 한 황소의 고삐를 잡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등 뒤에는 휘어진 초승달이 멍에처럼 걸려 있었다.
아버지가 소를 팔러 갈 때면 꼭 나한테 고삐를 잡게 했다. 신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농사짓는 소를 팔아야 하는 억장 무너지는 가슴을 내가 알도록 함이었을까. 아침부터 우시장 말목에는 먼저 와 매인 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한낮이 되어도 걷히지 않는 안개처럼 굴레에 얽매여 어쩔 수 없이 순종해온 울음소리가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유달리 크고 선한 눈망울이 사납게 뿔을 내저을 때마다 나를 원망하는 듯 댕그랑댕그랑 워낭이 울었다.
오냐. 오냐. 내가 너를 구속하고 죽도록 부렸다. 거간꾼이 건네주는 돈다발을 침 묻혀 헤아리던 아버지는 고삐를 바투 잡아 쥐고 긴 한숨을 되새김질하는 소 목덜미를 연신 쓰다듬으셨다.
ㅡ『고삐』(동학사, 2025)에서

[해설]
식구인 소와의 슬픈 헤어짐
농경사회에서 제일 튼튼한 일꾼이 있으니 소다. 소는 한 집안의 큰 재산이기도 하다. 환전의 측면에서. 교환가치의 측면에서. 그래서 아버지는 자식의 신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식구나 다를 바 없이 지냈던 소를 우시장에 내놓고 팔기로 한다.
소를 시장으로 데려갈 때 아들에게 고삐를 쥐게 하는 아버지의 의도는 “억장 무너지는 가슴을 내가 알도록 함”이었다. 네 학비를 대기 위해 우리 모두가 사랑하고 아낀 이 소를 판단다, 공부 열심히 할 거지? 아들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는 참 순하게 생겼다. 사납게 키워 투우나 소싸움에 내보내는 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소는 크고 선한 눈망울을 갖고 있다. 주인한테 대단히 순종적이다. 하지만 자기를 팔아버리며 이곳에 데려온 것임을 잘 알기에 아들인 나를 원망하는 듯 사납게 뿔을 내젓고, 댕그랑댕그랑 워낭이 울린다. 아버지도 정이 듬뿍 든 소와의 헤어짐이 안타까워 소 목덜미를 연신 쓰다듬는다.
소는 다른 집에 팔려가 또 밭갈이에 동원되거나 짐꾼 노릇을 할 것이다. 그러다 언젠가 도축되어 식탁에 오를 것이다. 부위별로 참 알뜰히도 먹는다. 소를 팔았으니 소 목에 달린 방울인 워낭이 내는 소리를 아버지와 아들은 한동안 듣지 못할 것이다. 집에 송아지가 있다면 부모 자식 간에 이별한 날이다. 우리는 결국 이별의 고삐를 놓고 말 것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는 만고불변의 진리인데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마다할 수 있으랴.
[권달웅 시인]
1943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나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75년 박목월에 의해 《심상》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해바라기 환상』 『사슴뿔』 『바람 부는 날』 『지상의 한사람』 『내 마음의 중심에 네가 있다』 『크낙새를 찾습니다』 『반딧불이 날다』 『달빛 아래 잠들다』 『염소 똥은 고요하다』 『공손한 귀』 『광야의 별 이육사』 등이 있고, 시선집으로 『초록세상』 『감처럼』 『흔들바위의 명상』 등이 있다. 편운문학상, 최계락문학상, 펜문학상, 신석초문학상, 녹색문학상, 목월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나무 앞에서의 기도』 『사람 사막』 등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