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87] 박승일의 "문자의 재해석"
문자의 재해석
박승일
시대가 변했다 따라서 문자의 해석도 달라져야 한다
→ 알아서 기시오
←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으시오
↑ 닥치고 줄 서시오
↓ 문 닫고 꺼지시오
♂ 애인 있는 사람 손 드시오
♀ 애인 없는 인간 입장 금지
★ 우주선 탑승장
※ 남녀 공용 사우나
₩ 화장지 말고 돈으로 해결하시오
♥ 뽀뽀 한번 할까
Tel 조용히 하시오
●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도시오
+ 이인분 기준
― 맛보기
× 곱빼기
÷ 더치페이
시가 유서를 닮아 가오
장례준비를 해야 할 것 같소
—『나도 숨 쉬고 싶다』(도서출판 좋은땅, 2024)

[해설]
문자 없이는 살 수 없다
지금 이 시대는 문자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컴퓨터 문자표에 들어가면 수천 개가 있는데 그보다 훨씬 많은 문자를 우리는 쓰고 있다. 수학 공식, 화학 방정식, 각종 기호도 문자의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자, 여러분 이제 하트 모양을 만드세요” 하면 수십 명이 일제히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린다. 문장 하나를 문자가 대신하는데 문자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약속이다. 시인은 그런데 어느 날 의문이 들었다.
왜 저 문자의 저 뜻에 내가 동의해야 하는가. 따라야 하는가. 나는 달리 생각하고 싶다.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싶다. 규약에 따르는 것은 복종인데 나는 복종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이해하고 싶다. 물론 나는 내심 그렇게 생각할 뿐 원래의 의미를 뒤집어서 달리 써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시인의 거부감 내지 반항의식은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를 ‘문 닫고 꺼지시오’로, 강조를 뜻하는 ※를 ‘남녀 공용 사우나’로, 더하기를 ‘이인분 기준’으로 아주 다르게 쓰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생각을 남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으니 스스로 그렇게 생각해 보며 즐거워할 따름이다.
그러다 마지막 연에 이르러 “시가 유서를 닮아 가오/ 장례준비를 해야 할 것 같소”라고 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세상의 많은 시가 비장하기 때문에? 고뇌에 차 있기 때문에? 일방적인 자기주장이기 때문에? 소통 불능을 강요하기 때문에?
예전에는 시가 유서가 아니라 잘 전달되고 잘 이해되는 것이었는데 오늘날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자기는 장례준비를 해야겠다고 자조하고 있다. 문자의 재해석도 그런 차원에서 해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세상의 질서를 지키지 않으려는 이가 시인이기에 ‘문자’라는 상식이자 약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리라. 대체로 시인은 남들과 대화하고 싶어 시를 쓰는데 내가 유서를 쓰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박승일 시인]
1956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성악을 전공했다. 2011년 《시로 여는 세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