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호의 時부렁調부렁 42】 붓이 붓다
붓이 붓다
김선호
한 뼘 남짓 쬐끄만 기 거품 물고 덤비는디
시키는 대로 안 한다고 제멋대로 나간다고 어지간히 이 몸한테 지청구를 쏟아내니 내도 마 참았던 속내 내친김에 꺼내리다 원래 그 서예란 기 서도라고 안 하능교 먹을 갈며 묵향 빚어 마음부터 다스리거늘 먹물통 찔끔 짜내서 글씨라고 쓰실라요 닳고 닳아 버린 붓이 산더미를 이뤘어도 벼루 씻은 연못이 시커멓게 변했어도 아직도 모자란다며 왕희지는 붓을 잡거늘 겨우 몇 해 끄적거려 성인 흉내나 내려다가 붓이나 탓하면서 핑곗거리 찾는 이는 여우 털 족제비 털도 빗자루나 한가지라요 적당히 힘을 빼서 강약을 조절하고 눈치껏 쉬어 가며 완급도 맞춰야거늘 어째서 성깔만큼이나 한 번에 휙 긋는다요 그러잖아도 내리막 세월 갈수록 가속 붙는디 붓마저 빨리 놀리면 머잖아 끝에 닿는디 그리도 저 너머 세상을 빨리 보고 싶은 게요?
올해는 병오년이라 말조차도 달리잖소!

글씨 쓰는 일에만 몰두하던 왕희지에게 그 모친이 물었다. 그만하면 누구보다 훌륭하거늘 왜 그렇게 연습에 골몰하느냐고, 이제 좀 내려놔도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는, 이제까지 남의 서체만 베낄 뿐이니 더 연습해야 한다며 결국 일가를 이뤄냈다.
그는 만두에 마늘 소스 찍어 먹기를 즐겼다. 어느 날 입이 온통 시커먼 걸 본 모친이 소스 맛을 물으니, 평소보다 더 맛있다고 대답한다. 글씨에 집중하느라 마늘 소스 대신 먹물을 찍어 먹고도 그 맛을 모른 것이다. 닳아서 쓸 수 없게 된 붓을 밖에 버렸는데 산을 이뤘다 해서 필산(筆山)이요, 붓과 벼루를 씻은 연못 물이 새까맣게 변하여 묵지(墨池)라는 말이 생겨났다.
서예 초년생 주제에 마음만 앞서다 보니 자주 혼난다. 성격이 급하고 파르르하니 필력도 늘 제자리다. 마음에는 천천히 쓴 듯한데, 먹물 궤적만 보고도 선생님은 속도를 눈치채신다. 글씨 전에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붓조차 잔뜩 부어 이러쿵저러쿵 투덜댈까.
군대 말년 시절,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달력에 가위표를 그으며 전역 날짜를 기다렸다. 빨리 가기를 갈망한 세월이었으나 한없이 느렸었다. 그런 세월이 요즘은 빨리도 간다. 그때나 지금이나 고치지 못한 급한 성격은 그 속도를 더 부추긴다. 무에 그리 급하다고 허둥지둥하는지, 이제라도 고쳐야 할 텐데…. 말이 뛰기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달이나 지났다.
김선호 시인, 코리아아트뉴스 문학전문기자

조선일보 신춘문예(1996)에 당선하여 시조를 쓰고 있다. 시조를 알면서 우리 문화의 매력에 빠져 판소리도 공부하는 중이다. 직장에서 <우리 문화 사랑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으밀아밀』 『자유를 인수분해하다』등 다섯 권의 시조집을 냈다. 코리아아트뉴스 문학전문기자로 활동하며, 충청북도 지역 문화예술 분야를 맡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