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임의 시조 읽기 12】임태진의 "가장"

가장
임태진
젊은 날 당신은 참 무거운 가장이었다
가족들의 생계를 두 어깨에 짊어지고
묵묵히 경주마처럼 달려오신 아버지
실직 후 당신은 참 가벼운 가장이었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일자리를 얻지 못해
막걸리 한두 잔으로 끼니 하던 아버지
퇴직 후 당신은 가장 무거워졌다
고혈압 고지혈증 암세포까지 점령해
온몸이 망가진 채로 꼼짝 못하던 아버지
칠순 지나 당신은 가장 가벼워졌다
더 이상 집안에서 존재감이 없어서
한순간 다 내려놓고 날아가신 아버지
《오늘의시조 2025 상반기호 19》 (이미지북)
오월이다.
시인 노천명은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했다. 봄이 무르익어 온갖 색들이 드러나는 계절이다. 꽃은 씨앗에서 발아하고 성장하며 절정을 맞았다가 소멸한다. 그 모습이 사람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있다.
우리는 누구의 한 사람의 아이로 태어난다. 그 순간부터 누군가는 부모가 된다. 부모라는 이름 중에서도 ‘아버지’라는 존재는 오랫동안 묵묵함과 책임, 그리고 사회적으로 부여된 강인함이 상징이었다.
임태진 시인의 「가장」은 누구에게나 있을 얘기를 미화(美化)없이 사실적으로 쓴 시다. 아버지들에게는 미처 마음을 보이지 못한 얘기, 우리들에게는 헤아리지 못했던 삶이, 가슴 밑바닥을 후벼 판다. 아버지란 이름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낸 나의 아버지, 미래의 아버지 모습일 수도 있겠다.
젊은 날 참 무거운 가장, 실직 후 참 가벼운 가장, 퇴직 후 가장 무거워지고, 칠순 지나 가장 가벼워졌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버지는 가장이면서도 중심이 되지 못했고 언제나 그림자 같은 존재로 살았다. 우리 뒤를 받쳐주는 배경처럼 젊은 날 취미를 미루고, 꿈을 타협하며, 자신을 지우며 살아갔다.
내일은 어버이날이다. 우리는 당신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본다.
아버지
당신이 걸어간 그 길 위에 아직도 바람이 붑니다.
당신의 숨결처럼
당신의 아픔처럼
강영임 시인, 코리아아트뉴스 문학전문기자

서귀포 강정에서 태어나 2022년 고산문학대상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시집 『시간은 한 생을 벗고도 오므린 꽃잎 같다』
[편집자주: "강영임의 시조 읽기" 코너는 매주 수요일 아침에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