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개에 생명과 사랑의 빛을 새기다…김영준 명인, 나전칠기 33년 예술 여정
검은 옻칠 위에 얇게 다듬은 자개 조각 하나가 놓인다. 처음에는 작고 미세한 빛에 불과하지만, 수백 개에서 수천 개에 이르는 자개편이 장인의 손끝에서 이어지며 원과 나비, 달항아리와 우주의 풍경으로 다시 태어난다.

관람자가 작품 앞에서 움직일 때마다 색은 청색에서 보랏빛으로, 다시 초록과 금빛으로 달라진다. 작품은 한자리에 머물러 있지만, 빛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새로운 장면을 만든다. 그 변화하는 빛 속에는 김영준 작가가 나전칠기와 함께 걸어온 33년의 시간이 담겨 있다.

한국 전통공예인 나전칠기를 현대미술의 언어로 재해석해 온 김영준 작가가 2026년 7월 16일부터 8월 8일까지 서울 송파구 문정동 유앤갤러리에서 ‘33주년 기념 초대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가구와 생활공예품의 장식 요소로 인식돼 온 나전을 캔버스와 회화, 부조와 오브제의 영역으로 확장해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구축해 온 김영준의 예술 여정을 조명한다.

전시장에는 자개 조각이 중심에서 바깥으로 소용돌이치며 거대한 파동을 이루는 원형 작품을 비롯해 달항아리의 형태와 빛을 결합한 작품, 나비와 식물의 생명성을 담아낸 구상작품, 선과 색면이 교차하는 추상작업 등이 소개된다.
증권맨에서 나전칠기 작가로
김영준의 출발은 전통공예인의 일반적인 길과는 달랐다.
그는 금융계에서 근무하던 증권맨이었다. 안정된 직장과 경력을 이어갈 수도 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품어 온 미술에 대한 열망과 자개가 만들어내는 오묘한 빛은 그를 전혀 다른 길로 이끌었다.
빠른 판단과 수치가 중요한 금융인의 삶에서 벗어나, 그는 기다림과 반복이 필요한 장인의 세계로 들어섰다. 조개껍데기를 얇게 갈고, 작은 형태로 자르고, 하나씩 붙인 뒤 옻칠과 연마를 거듭하는 나전칠기 작업은 단기간에 결과를 얻기 어려운 노동이다.
그러나 김영준은 오랜 시간을 견디며 전통기법을 익혔다. 동시에 옛 문양과 제작방식을 그대로 반복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자개를 장롱과 함, 소반의 장식에서 독립시켜 캔버스 위에 올렸으며, 원과 면, 추상적인 선과 색채를 결합해 나전칠기를 하나의 현대회화로 발전시켰다.
그의 작업은 ‘사용하는 공예’에서 ‘감상하고 사유하는 예술’로 나전의 영역을 확장해 온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빛은 생명이며, 생명은 사랑이다”
김영준 작품의 가장 중요한 언어는 ‘빛’이다.
자개는 스스로 빛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아 수많은 색으로 반사한다. 같은 작품도 바라보는 방향과 거리, 조명의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색채와 깊이를 드러낸다.
김영준에게 빛은 단순한 시각적 효과나 아름다운 장식이 아니다. 빛은 생명을 상징하고, 생명은 사랑으로 이어지며, 사랑은 인류의 평화와 평안을 향해 나아가는 근원적인 힘이다.
“제가 빛으로 작업하는 이유는 빛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인류의 평화와 평안입니다.
그래서 저는 빛으로 작업합니다.
작품에서 비추어지는 사랑의 빛을 통해 사람들이 치유받고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작가는 작은 자개 조각에 빛을 담고, 그 빛을 다시 사람들에게 돌려준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표면 아래에는 타인을 향한 사랑과 위로, 평화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자리한다.
따라서 김영준의 나전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아름다운 색을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작품에서 반사되는 빛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상처와 고단함을 잠시 내려놓는 치유의 과정이 된다.
물결과 우주의 시간을 품은 원형 작품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원형 연작은 김영준의 예술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잘게 다듬은 자개편을 화면의 중심에서부터 원을 그리듯 반복해 붙인다. 작은 조각들은 서로 다른 크기와 모양, 색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의 거대한 흐름 안에서 연결된다.
그 모습은 물속으로 떨어진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파문처럼 보이기도 하고, 수많은 별과 행성이 회전하는 우주의 궤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원은 탄생과 소멸, 시작과 귀환을 반복하는 생명의 순환을 떠올리게 한다.
원형 화면에 드문드문 놓인 나비는 생명의 변화와 자유, 영혼의 이동을 상징한다. 나비는 자개의 파동 속을 날며 무거운 현실에서 벗어나 빛을 향해 나아간다.
작품을 이루는 자개 조각 하나하나는 작가의 손길과 시간을 품고 있다. 자개를 붙이고 칠하고 갈아내는 반복적인 행위는 화면 위에 축적된 시간의 지층이 된다.
달항아리에 담은 한국의 마음과 우주
김영준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상징은 달항아리다.
조선의 달항아리는 과도한 장식보다 비움과 절제, 넉넉하면서도 완전하지 않은 균형을 통해 한국적 미감을 보여준다. 김영준은 이 단순하고 둥근 형태 안에 자개와 옻칠, 황금빛 질감을 더한다.

검은 화면에 떠 있는 황금빛 항아리는 단순한 생활용기가 아니다. 빛과 기억, 사랑을 담는 그릇이며, 한국의 전통과 현대인의 내면을 이어주는 매개체다.
자개의 미세한 조각으로 완성된 항아리는 보는 각도에 따라 윤곽과 빛이 달라진다. 때로는 한 점의 도자기로, 때로는 어둠 속에 떠 있는 달이나 행성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달항아리를 통해 비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는 한국적 사유를 보여준다. 그 안에는 장인의 시간과 자연의 빛, 관람자의 기억과 감정까지 함께 담긴다.
기능과 장식을 넘어 회화가 된 나전
김영준의 작품은 나전칠기의 전통적인 기능과 장식성을 넘어선다.

초기 작업에는 꽃과 나비, 열매, 곤충 등 자연의 형상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삼베나 옻칠 바탕 위에 자개로 식물과 생명을 표현하며 전통회화의 서정성과 공예적 섬세함을 함께 보여준다.

이후 작품에서는 선과 면이 자유롭게 교차하고, 자개와 금속성 재료가 화면 밖으로 뻗어 나오며 추상적인 긴장감을 만든다. 검은 선과 원색의 색면, 화면을 가로지르는 입체적 구조물은 나전이 전통문양에만 머물지 않고 현대 추상미술의 재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의 원형 연작에서는 구체적인 형상이 더욱 절제되고, 자개의 빛과 물성 자체가 작품의 중심이 된다. 잘게 자른 자개 조각은 화가의 붓질을 대신하고, 반복적인 배열은 작가의 호흡과 시간을 기록한다.
평면의 작품은 조명과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회화이면서 부조이고, 빛이 개입하는 설치작품처럼도 보인다. 김영준은 이를 통해 공예와 회화, 조각과 설치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이어진 인연
김영준의 이름이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데에는 전통기술과 현대산업을 결합한 특별한 작업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를 위한 엑스박스 디자인과 주문 제작을 진행했다.

2009년에는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를 위한 아이폰 케이스를 나전칠기로 제작했다. 세계 첨단기술을 상징하는 디지털 기기에 한국의 옻칠과 자개를 입힌 작업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빠르게 생산되고 교체되는 디지털기기와 수많은 손길과 긴 시간을 거쳐 완성되는 전통공예가 하나의 작품에서 만난 것이다. 이를 통해 김영준은 나전칠기가 과거의 유물에 머무는 기술이 아니라 현대인의 일상과 첨단산업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살아 있는 예술임을 알렸다.

2014년에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위한 옻칠 의자를 제작했다. 화려한 권위보다는 절제와 경건함을 담은 의자에는 한국 장인의 정성과 환대의 정신이 스며들었다.
엑스박스와 아이폰 케이스, 교황의 의자는 서로 다른 기능과 의미를 지닌 물건이다. 그러나 김영준의 손을 거치면서 한국의 전통공예가 세계와 만나는 문화적 매개체가 됐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원주에서 만나는 ‘김영준나전미술관’
김영준의 33년 예술세계는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에 자리한 ‘김영준나전미술관’에서도 만날 수 있다.

김영준나전미술관은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신림면 소야1길 72, 피노키오숲 내에 자리하고 있다.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공간에서 작가의 나전칠기 작품과 작업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전문 전시공간이다.
미술관에서는 김영준이 오랜 시간 발전시켜 온 원형 나전작품과 달항아리, 추상작업을 비롯해 전통 나전칠기의 섬세한 기법과 현대적인 조형실험을 확인할 수 있다. 작품을 통해 나전칠기가 생활공예에서 출발해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변화해 온 과정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특히 나전은 자연광과 조명, 관람자의 위치에 따라 색과 깊이가 달라지는 재료다. 실제 작품 앞에서 감상할 때 사진으로는 모두 담기 어려운 자개의 입체감과 섬세한 빛을 확인할 수 있다.
미술관은 한 작가의 작품을 보존하고 소개하는 공간을 넘어, 한국 나전칠기의 전통과 현대적 가능성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장소라는 의미도 지닌다. 김영준은 이곳을 통해 자신의 작품세계뿐 아니라 한국 나전칠기가 지닌 정신과 아름다움을 국내외 관람객에게 지속해서 알리고 있다.
김영준나전미술관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신림면 소야1길 72, 피노키오숲
작가·관람 문의: 010-3249-9963
33년 동안 쌓아 올린 사랑의 빛
김영준에게 33년은 단순한 활동 기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개를 선택하고 다듬고, 조각을 붙이고, 옻을 칠한 뒤 다시 갈아내는 과정이 겹겹이 쌓인 시간이다. 관람자가 마주하는 화려한 빛의 이면에는 반복과 기다림, 실패와 재도전을 견뎌온 장인의 삶이 존재한다.



그는 전통을 과거의 모습 그대로 보존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전통이 오늘날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나전칠기가 현대미술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모색해 왔다.
가구의 장식으로 여겨지던 나전을 독립적인 예술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세계적인 인물들과의 협업을 통해 한국 공예의 가능성을 넓힌 김영준. 그의 작품에서 빛은 과거의 영광을 비추는 장식이 아니라, 생명과 사랑을 전하고 미래를 밝혀주는 메시지다.

이번 전시는 한 장인의 지난 33년을 돌아보는 자리인 동시에, 김영준의 나전칠기가 앞으로 비추어갈 새로운 시간을 만나는 자리다.
빛을 받을 때마다 다른 색으로 변화하는 자개처럼 그의 예술은 전통과 현대, 한국과 세계, 공예와 순수미술 사이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빛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빛은 관람자의 마음에 닿아 위로와 치유, 평화와 행복의 메시지로 다시 이어진다.
전시 개요
전시명: 김영준 작가 ‘33주년 기념’ 초대 개인전
영문명: Kim Youngjun Invitational Solo Exhibition
전시기간: 2026년 7월 16일~8월 8일
전시장소: 유앤갤러리
주소: 서울시 송파구 중대로 80, 문정프라자 2층 10전시실
문의: 02-6080-0117
이메일: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