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236] 허유미의 "행복"

이승하 시인
입력
수정

행복

 

허유미

 

자취방 골목 앞 노점상 어묵집

열 시쯤 문 닫을 시간이면

어묵 몇 개와 국물이 잔뜩 남아 있었다

천 원 주고 큰 냄비를 내밀면

남은 어묵과 국물을 내가 원하는 만큼 받을 수 있었지

일주일 동안 국 걱정이 없었지

밤비처럼 흐르는 콩나물

두부처럼 떠오른 달

성게알처럼 흩어지는 별

모두 담긴 냄비가 무거워 배에 받치고 오면서

뜨끈하고 배부른 즐거움에 짝짝이 슬리퍼는 잊고

가로등 꺼진 날은 국물이 흐를까 봐

눈을 있는 힘껏 크게 뜨고 다니다 보니

눈이 커지고 예뻐졌다나 뭐라나

어묵 국물에 대파를 넣으면 대파국,

미역을 넣으면 미역국,

국만 먹어도 고향에 닿은 기분

 

―『바다는 누가 올려다보나』(걷는사람, 2025) 

행복_ 허유미 [ 이미지 :류우강 기자]

   [해설]

 

   행복의 척도

 

   당신은 언제 행복하다고 느낍니까? 스스로, ‘난 지금껏 행복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어라고 대답하고 싶은 분이라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어렸을 때 부모님과의 외출시, 학창시절 친구랑 얘기꽃을 피우며 시장통에서 뭘 사 먹을 때, 여행지에서 좋은 풍경을 볼 때, 연애에 빠졌을 때, 작은 상을 받았을 때, 엄마가 내 얘기를 듣고 칭찬을 해주실 때, 첫 월급 탔을 때, 좋은 영화 한 편을 보았을 때, 강아지랑 함께한 시간……. 행복은 올림픽에서 우승했을 때만 느끼는 것이 아닐 겁니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작은 기쁨이 곧 행복이 아닐까요.

 

  이 시의 화자는 자취생이었습니다. 골목 앞 노점상 어묵집은 10시쯤 문을 닫는데 큰 냄비를 들고 가서 천 원을 내밀면 남은 어묵과 국물을 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국 끓일 걱정이 사라지니까 행복감이 찾아오는 겁니다. 콩나물, 두부, 성게알까지 들어가 있는 오뎅 국물! 우아, 안 먹어도 속이 뜨끈하고 배가 부릅니다. “눈을 있는 힘껏 크게 뜨고 다니다 보니/ 눈이 커지고 예뻐졌다나 뭐라나에서 미소를 머금었습니다. 어묵 국물에 대파를 넣으면 대파국이 되고, 미역을 넣으면 미역국이 되니 자취생은 행복해지는 겁니다. 국만 먹어도 고향 제주도 모슬포에 닿은 기분이니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우리는 부귀와 영화, 권력과 영광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은 이상하게도 허무함을 동반합니다. 작은 성취에도 기쁨을 느끼고, 사건이나 사고 없이 하루를 보낸 것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게 곧 행복이지 뭐가 행복이겠습니까. 무병, 무탈, 무사 같은 것이 행복이지 뭐 대단한 행복이 따로 있을까요. 소시민의 안이함이라고 탓하여도 좋습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불행의 척도를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버스나 지하철이 저를 목적지에 데려다줘도 행복해합니다. 차가 고맙고 기사분이 고맙고. 밥을 먹을 때는 농부와 요리사한테 고마움을 느끼면서 먹습니다. 10년 동안 요양원과 요양병원에 면회를 다니다 보니 숟가락 들 힘이 있다는 것에서도 행복감을 느낍니다. 저는 바보입니다.

 

  [허유미 시인]

 

  제주 모슬포에서 태어나 2016년 《제주작가》 신인상과 2019년 《서정시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제주대 국문학과 졸업. 청소년 시집 『우리 어멍은 해녀』, 공동 시집 『시골시인-J』가 있다. 9회 박영근작품상을 수상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email protected]

share-band
밴드
URL복사
#이승하시인#하루에시한편#시해설#허유미시인의행복#행복시#코리아아트뉴스시해설#허유미시인#좋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