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농의 손자 허 진, 40년 화업을 돌아보다…세종뮤지엄갤러리서 개인전 《말이라 불리운 사나이》
한국 남종화의 전통을 동시대적 조형언어로 확장해 온 허진 작가의 개인전 《말이라 불리운 사나이》가 8월 19일부터 30일까지 서울 광진구 세종대학교 대양AI센터 세종뮤지엄갤러리 1·2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1991년부터 전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해 온 허진 작가의 정년퇴직을 기념하는 자리이자, 약 40년에 이르는 화업을 돌아보는 기획전이다. 전시 제목 《말이라 불리운 사나이》에는 지나온 작업의 시간을 되돌아보는 동시에, 정년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새로운 창작의 길을 이어가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담겨 있다.
허진은 한국 근현대 남종화의 중요한 계보를 잇는 작가다. 고조부 소치 허련(1808~1893), 조부 남농 허건(1908~1987)으로 이어지는 전통 회화의 뿌리 위에서 성장했지만, 그는 전통의 형식과 기법을 그대로 계승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전통을 현재의 시선으로 다시 해석하고, 인간과 자연, 사회와 환경, 생명과 문명의 문제를 새로운 조형언어로 풀어내며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구축해 왔다.
허진의 작업은 한국화의 재료와 정신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콜라주와 아크릴, 다양한 이미지의 중첩과 결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서로 다른 생명체와 인간, 기계적 이미지, 풍경과 기호가 한 화면 속에서 충돌하고 공존하며 현대사회의 복잡한 구조를 드러낸다.
작가는 1980년대 후반부터 전통 동양화의 고정된 문법을 벗어나기 위한 실험을 이어왔다. 초기 개인전 ‘묵시’를 통해 전통 재료와 콜라주 기법을 결합한 작업을 선보이며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고,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보다 직접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했다.
특히 ‘다중인간’, ‘현대인의 초상’ 등의 연작은 급변하는 사회 안에서 정체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의 모습과 소외, 불안, 관계의 파편화를 다뤘다. 이후 2010년대에 들어서는 검은 인물 형상과 동물, 기이한 생명체가 결합된 ‘이종융합동물’, ‘유목동물’ 등의 연작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경계, 생명 종 사이의 관계, 문명과 환경의 충돌을 더욱 확장된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번 전시에서도 이러한 허진의 조형적 문제의식이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화면 속 동물은 단순한 자연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과 불안, 사회적 관계, 생태적 위기까지 끌어안은 복합적인 상징체로 등장한다. 인간과 동물의 형상은 때로 뒤섞이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며 새로운 존재로 재구성된다.
대표적인 ‘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 연작에서는 거대한 동물의 몸체와 인간 형상, 기계와 일상의 사물들이 한 화면 안에서 뒤엉킨다. 화면 곳곳을 떠도는 작은 인간 군상과 동물, 기하학적 이미지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듯하면서도 하나의 생태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질문으로도 읽힌다.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을 지배하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생명체와 사물, 환경 가운데 하나의 존재로 자리한다. 작가는 이처럼 인간과 동물, 자연과 문명의 관계를 뒤섞음으로써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경계를 흔든다.

이번 전시에서는 기존 대표 연작과 더불어 미공개작인 ‘유전’ 시리즈와 최신작도 함께 소개된다. 허진이 오랜 시간 탐색해 온 생명과 유전, 변화와 공존이라는 문제의식이 최근 작업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확장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전시를 평론한 이주희 미술평론가는 허진의 작품세계를 ‘범람’과 ‘치수’의 개념으로 바라본다. 자연의 에너지와 생명력이 한없이 넘쳐흐르는 ‘범람’과, 그 흐름을 다스리고 새로운 질서와 생산성을 만들어내는 ‘치수’의 과정처럼 허진 역시 지난 40여 년 동안 현실과 역사,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화의(畫意)를 조형적으로 다뤄왔다는 해석이다.
허진의 화면은 실제로 안정된 질서보다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충돌하는 에너지에 가깝다. 수많은 인물과 동물, 사물과 풍경이 한 화면을 점유하며 서로의 경계를 밀어내고 다시 연결한다. 그러나 이러한 혼돈은 무질서 자체에 머무르지 않는다. 작가는 복잡한 이미지들의 관계를 다시 배열하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균형과 질서를 찾아간다.
이주희 평론가는 “허진의 예술은 현실에 베일을 덮는 예술이 아닌 베일을 헤치고 울타리 밖으로 나아가는 진로를 보인다”며, 원숙미와 야성미를 함께 지닌 허진의 향후 작업에 대한 기대를 밝힌 바 있다.
허진 역시 이번 전시를 통해 자신의 작업을 하나의 완결된 과거로 정리하기보다 또 다른 출발점으로 바라본다.
그는 “역사를 ‘변화’의 관점에서 볼 때 지금 나 자신을 새롭게 조명하고 싶었다”고 밝히며, 정년이라는 생애의 전환점을 예술적 변화와 갱신의 시기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드러냈다.
이번 개인전은 단순한 정년퇴직 기념전의 의미를 넘어 한국화가 현대사회와 어떻게 만나고 변화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하다. 소치 허련과 남농 허건으로 이어지는 전통 회화의 계보를 이어받으면서도 허진은 자신의 세대가 마주한 사회와 환경, 도시와 인간의 문제를 화면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 과정에서 산수와 필묵 중심의 전통적 동양화는 인간 군상과 동물, 기계와 사물이 뒤엉킨 동시대적 공간으로 변모했다. 전통은 보존의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해체하고 다시 구축하는 창작의 기반이 됐다.
인간과 자연, 동물과 문명 사이의 경계가 빠르게 재편되는 시대에 허진이 제시하는 ‘이종융합’의 세계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서로 다른 존재가 충돌하면서도 결국 한 공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그의 화면은 역동적인 서사로 보여준다.
40년에 가까운 화업을 지나 새로운 출발점에 선 허진. 《말이라 불리운 사나이》는 한 작가의 지난 시간을 정리하는 회고의 전시인 동시에,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다시 넘어서려는 작가가 다음 시대를 향해 내딛는 또 하나의 출발선이다.
전시는 8월 30일까지 이어지며 관람료는 무료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허진 작가 프로필

허진(Hur Jin)은 한국 남종화의 맥을 현대적으로 계승·확장해 온 한국화가다. 고조부는 조선 후기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1808~1893), 조부는 남농 허건(1908~1987)으로, 전통 남종화의 예술적 계보 속에서 성장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991년부터 전남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작품 활동과 후학 양성을 병행해 왔다.
1980년대 후반부터 전통 수묵과 채색의 조형성을 기반으로 콜라주와 현대적 이미지, 다양한 재료를 결합하며 기존 동양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작업을 선보였다. 이후 ‘다중인간’, ‘현대인의 초상’, ‘이종융합동물’, ‘유목동물’, ‘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 등의 연작을 통해 현대인의 실존과 소외, 인간과 자연의 관계, 생태와 문명, 공존과 생명의 문제를 탐구해 왔다.
금호미술관, 예술의전당 미술관, 교토 노무라미술관, 월전미술관, 성곡미술관, 주러시아 한국문화원, 떼아트갤러리 등 국내외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 1990’을 비롯해 ‘수묵별미-한중 근현대 회화’, ‘서화무진’, ‘공생과 병존’ 등 주요 기획전과 단체전에 참여했다.
제8회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제1회 한국일보 청년작가 우수상, 문화예술관광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등을 수상했으며,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금호미술관, 일본 교토 노무라미술관 등 국내외 주요 미술기관에 소장돼 있다.
전시 개요
- 전시명: 허진 개인전 《말이라 불리운 사나이》
- 기간: 2026년 8월 19일~30일
- 장소: 세종뮤지엄갤러리 1·2관
- 주소: 서울 광진구 능동로 209 세종대학교 대양AI센터
- 오프닝: 2026년 8월 21일 오후 5시
-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5시
- 관람료: 무료
- 주요 출품: ‘이종융합동물’, ‘유목동물’, ‘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 미공개 ‘유전’ 시리즈 및 최신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