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의 수필향기] 수난의 여름을 뛰어넘어 - 김유조
수난의 여름을 뛰어넘어
김유조
한반도의 여름은 찬란한 녹음의 계절인 동시에, 우리 역사의 가장 뜨겁고도 아픈 기억들이 응집된 시간이 아닌가 한다. 개인적 수난사로는 우선 '육이오사변(한국전쟁)'을 꼽을 수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일 년쯤 학교에 다니던 다음 해 여름에 나는 피란열차에 몸을 싣게 되었다. 아버지는 늙으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낙동강변의 시골에 남고, 우리 어린 형제들만 어머니가 데리고 낙동강을 건너 대구와 밀양까지 피난을 가게 된 것이다. 크게 반공가족도 아니면서 공산당을 두려워한 전반적인 당시 분위기를 지금 유추해 볼 수 있게 된다. 아무래도 이른바 북한의 '남조선 해방 운동'은 처음부터 무언가 그릇된 정보와 판단에서 시작되었거나 일반적인 정복 전쟁의 성격이 아니었던가 싶다.
지금은 공단이 들어선 큰 도시가 되었지만 당시의 내 고향 구미는 국도와 경부선이 달리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어느 틈엔가 국도에는 후퇴하는 미군 트럭이 줄줄이 서 있었고 처음 보는 백인 병사가 집 앞 전봇대에 올라가서 전화기로 쏼라대더니 우리를 보고는 "아미망 아미망 아마미요"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놀란 가슴을 쓸어 안으면서도 신기해 한 기억이 난다. '아리랑'이 '아미망'이 된 데에는 무슨 음운상의 보편 현상이 있으려니, 나이가 들고 인문학을 전공하면서 언젠가는 한 번 규명해 보고도 싶었는데, 아무리 문헌을 뒤져보아도 그런 일반적 현상은 찾아보기 힘들어서 낙담? 비슷한 데에 빠진 적도 있다.
친척집들을 찾아서 남으로 내려간 피난생활의 신산함을 여기에서 다 쓸 수는 없다. 다만 수복을 할 때까지의 그해 여름은 무척 덥고 고통스러웠다는 기억만을 남긴다.
몬순 기후대에 속하는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여름이면 장마와 이에 따른 홍수 피해를 피할 수가 없었다. 낙동강 변에 살다보니 여름이면 항상 물난리를 겪고 야산에 올라가서 초가집과 가축들이 떠내려가는 것을 구경하던 일이 다반사였다.

역사적으로 근세사에서 큰 물난리를 들자면 '을축년 대홍수'(1925년)가 눈에 띈다. 그해 7월에서 9월에 걸친 대홍수는 네 차례의 태풍과 집중호우로 한강, 낙동강, 금강이 범람하고 당시 조선총독부 일년 예산의 약 58%에 달하는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었으며, 수천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때 얼마나 지형이 변했으면 풍납토성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여름의 홍수는 이에 그치지 않고 역병을 불러와서 민생을 더욱 괴롭혔다.
19세기 순조, 헌종 연간의 여름철에는 '호열자'라 불린 콜레라가 창궐해서 위생 시설이 부족했던 당시에 무더위와 장마로 오염된 물을 통해 전염병이 퍼지면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광복 당시 여름에도 호열자와 뇌염이 창궐한 기록이 있다.
총독부 예산 이야기가 앞서 나왔지만 나라는 벌써 1910년에 경술국치를 겪으며 일본의 식민통치에 넘어가 있었다. 이 땅이 일본에 넘어가던 해의 여름은 참으로 뜨거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8월 16일 통감 테라우치 마사타케가 이완용과 박제순을 불러 '한일병합조약' 초안을 제시하며 수락을 강요하고 8월 18일 내각회의에서 병합 조약안을 통과시켜서 8월 22일 창덕궁 흥복헌에서 마지막 어전회의 개최, 순종이 형식적인 비준권을 위임하고, 이완용과 테라우치가 병합 조약을 체결, 8월 25일 일제가 대한제국 내의 모든 정치 단체와 집회를 금지하며 저항의 싹을 자르고 8월 29일 조약이 공포됨으로써 대한 제국은 멸망하고야 만다.
가장 길고 숨 막히는 한 여름날의 비극이었다. 한때 우리는 '한일합방'이라고 배웠던 이 치욕은 '일제(식민지)시대'라는 표현을 거쳐서 지금은 '일제강점기'라고 한다. 여담이지만 이 용어가 혹시 오늘날 북한에서 '미제강점기시대'라고 부르는 맥락과는 상관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국제협약이 있다.
이 땅에서 여름 수난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좀 더 찾아보자면 큰 사건만도 한둘이 아니다. 우선 임진왜란과 평양성 함락(1592년 6월)이 떠오른다. 4월에 시작된 왜란의 불길이 가장 뜨거웠던 6월,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떠났고 평양성 마저 파죽지세로 왜군에 함락되고야만다.
한편 병자호란은 겨울에 발발했으나 그 이후 수년간 여름마다 청나라에 끌려간 포로들의 생환 문제와 전후 복구 과정에서의 기근은 백성들에게 끊임없는 고통이었다. 신미양요(1871년 6월) 역시 여름에 일어난 미국 함대의 강화도 침공 사건이다. 초지진과 덕진진이 함락되고,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조선군이 광성보에서 처절하게 항전하다 전사했다. 무더운 여름날, 압도적인 화력 차이 앞에 스러져간 병사들의 기록은 근세사 최고의 비극 중 하나였다.
임오군란(1882년 7월)과 동학 농민 운동(1894년 여름)도 이 계절에 일어난 사건이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7월)하면서 평화적인 개혁의 꿈은 무너지고, 다시금 전쟁의 참화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경신대기근(1670년~1671년)은 조선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기근으로, 1670년 여름에 몰아친 유례없는 가뭄과 뒤이은 태풍, 홍수는 재앙의 시작이었다. 이 시기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사망한 인구는 임진왜란 당시 희생자보다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겪은 자연재해로는 '사라호 태풍'을 들 수 있다. 1959년 9월, 엄밀히는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는 추석 무렵이었으나, '여름 태풍'의 파괴력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인 849명의 사망, 실종자를 냈다. 추석 휴일이라 학교를 쉬고 낙동강변의 집으로 와 있다가 그 어마어마한 참상을 맛보게 되었다. 다행히 직접적 피해는 적었으나 주변에는 한국전쟁만큼의 손실을 입은 집들이 적지 않았다.
이제 막 다가오는 여름을 너무 수난의 계절로만 되돌아본 것 같다. 아마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우리처럼 3년을 넘어 계속되고 새로 중동 전쟁이 터져서, 우리나라도 직간접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는 현실이 부정적인 감상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자면 우리의 여름은 바로 광복의 기쁨을 안은 계절이 아니던가. 분단의 비극이 또한 이 여름에 일어났지만 우리는 전쟁의 참화를 겪어내고도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으며 오늘날 세계적 전란의 시기에도 최고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초유의 무역흑자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뜨거운 여름의 에너지를 충만하게 받아들여서 나라의 저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는가 싶다.
얼마 전에는 BTS라고 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아리랑 페스티벌'을 벌여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하고, 지금까지 서구와 미국의 문화계를 주름잡고 있다. 이제 아리랑을 '아미망'이라고 잘못 부르는 세계인은 없다. 무릇 자부심을 갖고 가슴을 펼 일이다.

[심향 단상]
역사를 한 눈에 읽는 듯 간결하게 설명해주셔서 많은 사건 사고들을 쉽고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부모님, 선조들께서 어떻게 이 힘든 시대를 건너 삶을 살아내셨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계속되는 전쟁과 약탈과 홍수와 질병, 특히 여름에 일어난 많은 전쟁과 홍수로 당시에 얼마나 피폐하고 힘든 삶을 사셨을지를 생각하니 눈물이 앞섭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귀한 체험의 글을 써주신 김유조 시인님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우리의 부모님들, 선조들께서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희생과 각오로 힘겹게 나라를 지켜내셨음을 깊이 느끼며, 가슴속에 존경과 사랑과 애잔한 마음이 일렁거립니다.
수차례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은 우리 민족이 수없이 밟히고 꺾이고, 벼랑 끝에서 눈물 흘리며 끝도 없는 인내의 길을 걸어와야 했습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한민국. 우리 민족은 오랜 기간 왜 그런 아픔의 역사를 끊임없이 겪어야만 했는지 가슴 치며 슬픔을 가눌 수 없는 심정입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전쟁을 피하려면 늘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나라가 없으면 나의 미래도 없다'는 외침과 함께 굳은 의지로 준비하여 이 나라를 굳건히 지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 속에 길이 있다' 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난 세월 겪었던 많은 사건들을 들여다 보면 늘 내부의 갈등과 외부에 기대어 외부 세력과 결탁하여 국가의 위기를 불러온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우리가 나라 사랑으로 똘똘 뭉쳐 우리의 단결로, 이 나라의 앞날을 책임지고 개척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뼛속 깊이 새겨서 더 이상 우리 민족에게 전쟁의 슬픔과 배반의 역사는 없기를 바랍니다.
폭우 시 하천의 물을 가두어 하류 지역의 홍수피해를 막고, 가뭄이 이어질 때는 댐에 저장된 물을 방류해 가뭄을 해결함으로써 생활용수와 공업용수, 농업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 댐을 건설하였습니다. 댐 건설로 인해 많은 지역이 물에 잠기면서 그곳에 살던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이주해야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홍수대비를 위해서 설치된 댐 중에 낙동강 수계에는 안동댐과 임하댐, 합천댐, 남강댐, 밀양댐 등 여러 댐이 영남 지역의 홍수 조절과 농업용수, 공업용수, 생활용수 등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풍납토성(風納土城)은 기원전 199년에서 기원후 346년 사이에 지어진, (현)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토성(土城)으로 사적 제11호이며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이 정설로,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유실되면서 백제유물이 확인되어 풍남토성의 존재가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발굴조사 성과를 보면 어마어마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고, 올림픽대교와 천호대교 사이에 타원형으로 위치해 있습니다.
서울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는 한강에 인접해 있어서, 오랜기간 비가 많이 오면 침수되던 지역(상습침수지역)으로 주변에 사는 분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던 곳이었습니다. 풍납동에 아산병원이 들어설 때, 집중호우 시 아산병원을 포함한 풍납동 일대의 침수를 막기 위한 핵심시설로 풍납빗물펌프장(1984년)을 설치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풍납빗물펌프장의 중추적 역할로 더 이상 홍수로 물난리를 겪지 않게 되었고, 빗물펌프장은 우천시 불어난 빗물을 인근 하천과 강에 긴급 배수하는 침수 예방 시설입니다.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과거의 일을 반복하고야 만다' (조지 산타야나, <이성의 삶>에서)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지만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신채호 선생)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을 명심하여, 우리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평화를 위한 준비태세를 늘 갖추고, 지난 역사를 잊지 말고 '미래세대의 바른 역사교육'에 힘써야겠습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희생과 애국정신을 가슴 깊이 새깁니다.
김영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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