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임의 시조 읽기 35】 최성아의 "가을 통장"
가을 통장
최성아
한 섬 단풍 물은 열두 달 부은 적금
집합 금지 받은 숲은 만기 앞둔 보험 깬다
바람이 수런거린다
거래 내역 엿보며
불황에 지친 거리 서둘러 잎 떨구고
햇살이 모인 자리 금싸라기 출렁이는
플러스 마이너스 찍는 올가을이 익고 있다
『휴머니스트』 (2025. 책만드는집)

가을 숲은 오래 묵혀둔 통장 같다.
한 해 동안 차곡차곡 모아온 햇살과 비, 바람, 어둠이 잎사귀에 적금처럼 단풍으로 스며든다.
‘집합 금지’ 명령 받은 사람들이 제각각 흩어지듯, 단풍든 잎들도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진다. 그런 나뭇잎들은 불황에 만기 앞둔 보험을 깨고 적금을 깬다. 바람이 지나가며 거래 내역을 훑어보듯 사람들의 일상은 계좌 속 잔액처럼 불안하게 흔들린다.
불황에 지친 거리, 손님 없는 가게들은 가을나무처럼 제 잎을 서둘러 떨군다. 낙엽은 단순히 계절의 결과물이 아니라 버텨내지 못한 삶의 흔적, 잃어버린 소득과 무너진 일상을 말한다. 그러나 햇살이 모인 자리엔 금빛 물결이 출렁인다. 누군가는 여전히 희망의 숫자를 기록하려 작은 ‘플러스’를 꿈꾼다. 단풍의 붉음과 은행의 노랑은 마치 적자와 흑자의 표식처럼 계절의 장부에 찍혀간다.
「가을 통장」은 ‘가을의 아름다움’을 말하는데 있지 않고 자연현상을 경제의 언어로 치환했다는 점이, 이 시가 가지는 독특한 묘미다. 자연의 변화를 인간의 금융 활동에 대응시킴으로써, 독자들에게 계절의 색채 속에서 현실경제를 직관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이는 은유를 넘어선 은유적 구조의 확장성을 가져온다.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계절의 언어로 다시 표현해, 독자에게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열어 논다.
인간의 경제는 화폐로 기록되지만, 자연의 경제는 빛과 바람, 물과 흙으로 기록된다. 통장에 찍히는 플러스와 마이너스는 잎들의 색과 열매로 바뀌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자연은 가끔 냉혹하면서도 역설적인 자비를 품고 있다. 나무는 잎을 버려야만 뿌리에 힘을 모은다. 낙엽은 단순한 손실이 아니라, 다음 해를 위한 투자다. 자연의 장부에는 적자조차 미래를 위한 자산으로 기록된다.
가을 숲은 단순한 계절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우리의 삶과 경제를 다시 쓰는 사유의 공간이다. 통장에 남은 잔고의 크기를 넘어, 비우고 다시 채우는 자연의 순환 속에서, 진정한 풍요의 의미를 발견해 보는 것도 좋겠다.

2022년 고산문학대상 신인상 수상.
2025년 제1회 소해시조창작지원금 수상.
시집 『시간은 한 생을 벗고도 오므린 꽃잎 같다』
[편집자주: "강영임의 시조 읽기"는 매주 수요일 아침에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