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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규 칼럼] AI 시대, 인간의 혼을 깨우는 소리 - 바라지 축원이 남기는 질문

조선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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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은 이제 작곡과 편곡, 음색 모사와 리듬 설계의 영역에서 놀라울 만큼 정교한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바흐의 대위법도, 드뷔시의 화성도, 재즈의 즉흥 어법도 데이터로 분석해 그럴듯하게 재조합할 수 있습니다. 음정은 흔들리지 않고, 박자는 거의 오차가 없으며, 청취자가 선호할 만한 전개를 빠르게 계산해 냅니다. 기술적 완성도만 놓고 본다면, 이미 많은 영역에서 인간 연주의 약점을 보완하거나 넘어서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역설이 시작됩니다. 음악이 지나치게 완전해질수록, 사람은 오히려 완전하지 않은 소리에 더 깊이 끌립니다. 약간 늦게 들어오는 숨, 감정이 앞서 흔들리는 농음, 연주자들끼리 눈빛으로 주고받는 미세한 신호, 그날의 공기와 청중의 반응에 따라 달라지는 긴장과 이완은 악보만으로도, 데이터만으로도 온전히 환원되지 않습니다. 음악은 소리의 배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몸이 시간 속에서 결단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맥락에서 국악그룹 바라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바라지는 순우리말로 누군가를 정성껏 돌보고 돕는다는 뜻을 지니며, 전통음악에서는 주된 소리를 받치고 흥을 돋우는 반주자들의 즉흥적 소리와 행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즉, 바라지는 혼자 빛나는 예술이 아니라 곁에서 떠받치고 함께 완성하는 예술의 원리를 이름 자체에 담고 있습니다. 이 팀은 바로 그 정신을 토대로, 소리·타악·기악·몸짓을 아우르는 전통음악의 요소를 오늘의 무대 언어로 재구성해 왔습니다.
 

그들의 대표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인 바라지축원은 이 철학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진도씻김굿의 제석굿 가운데 오늘의 관객과 공감할 수 있는 축원의 내용을 추려 새롭게 짠 무대로, 무의식적 요소와 춤을 함께 배치해 ‘비는 마음’ 자체를 공연 형식으로 구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통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래된 의례를 오늘의 삶과 연결해, 전통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정서적 장치임을 입증한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씻김과 축원, 음악은 왜 애도를 대신할 수 없는가, 그러나 왜 애도를 도울 수 있는가, 오늘의 사회는 효율을 중시하지만, 상실을 다루는 데에는 유난히 서툽니다. 병원은 죽음을 관리하고, 장례는 절차화되며, 슬픔은 종종 빠르게 정리되어야 할 감정처럼 취급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은 행정 절차의 속도로 애도를 끝내지 못합니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상실은 몸에 남고, 풀리지 않은 슬픔은 오래도록 일상 깊숙이 가라앉습니다. 그래서 공동체는 오래전부터 슬픔을 혼자 감당하지 않기 위해 의례를 만들었습니다. 씻김굿 역시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진도씻김굿은 망자의 넋에 맺힌 한을 씻고 평안한 길을 빌어 보내는 의례이다.  바라지는 이 전통을 박제된 민속 자료로 다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담긴 감정의 구조를 현재형으로 번역한다. 실제로 이들의 공연 프로그램은 ‘비손’으로 기원을 열고, 진도씻김굿의 소리와 반주음악을 바탕으로 한 ‘씻김 시나위’를 거쳐, 후반부에서 ‘바라지축원’으로 공동체적 비원의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 슬픔, 기원, 생명력의 흐름이 하나의 서사처럼 이어지는 구성이다. [사진 : 진도씻김굿 장면]

진도씻김굿은 망자의 넋에 맺힌 한을 씻고 평안한 길을 빌어 보내는 의례입니다. 바라지는 이 전통을 박제된 민속 자료로 다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담긴 감정의 구조를 현재형으로 번역합니다. 실제로 이들의 공연 프로그램은 ‘비손’으로 기원을 열고, 진도씻김굿의 소리와 반주음악을 바탕으로 한 ‘씻김 시나위’를 거쳐, 후반부에서 ‘바라지축원’으로 공동체적 비원의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짜여 있습니다. 슬픔, 기원, 생명력의 흐름이 하나의 서사처럼 이어지는 구성입니다.
 

이 구조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인간 감정의 실제 작동 방식과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슬픔을 한 번에 털어내지 못합니다. 먼저 상실을 인정하고, 그다음 고통을 견디고, 끝내 다시 살아갈 이유를 더듬어 찾아야 합니다. 바라지의 음악은 바로 그 과정을 소리로 안내합니다. 낮게 가라앉는 선율은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직면하라고 말하고, 마찰음이 도드라지는 악기 질감은 슬픔이 결코 매끈하거나 우아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환기합니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리듬은 몸을 움직이게 하고, 관객은 울음 이후의 호흡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때 핵심은 ‘정확성’이 아니라 ‘공유’입니다. 애도는 정보 전달이 아니라 정서적 동행이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은 슬픔에 관한 수많은 문장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함께 통과해 본 공동체의 떨림, 산 자가 망자를 보내며 자기 삶까지 다시 돌아보게 되는 복합적 감정, 그리고 한 사람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의 가슴을 울릴 때 발생하는 공명은 계산만으로 대체되기 어렵습니다. 의례 음악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슬픔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대신 슬픔이 견딜 수 있는 형태를 부여합니다.
 

신명의 순간, 인간은 왜 리듬 속에서 다시 살아 있음을 느끼는가, 공연이 중반을 넘어서면 분위기는 분명하게 바뀝니다. 장단은 점차 밀도를 높이고, 타악은 공간의 중심을 장악하며, 무대는 관조의 자리에서 에너지의 자리로 이동합니다. 이 변화는 단순한 분위기 전환이 아닙니다. 충분히 눌러 두었던 감정이 다른 차원의 생명력으로 전환되는 순간입니다. 한국 전통음악이 오랫동안 슬픔과 신명을 분리하지 않고 함께 다루어 온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깊이 슬퍼할 줄 아는 사람만이 깊이 살아낼 수 있다는 통찰입니다.
 

바라지의 음악은 특히 이 전환을 앙상블의 구조로 설득합니다. 이 팀은 지역 굿의 원형과 전통음악의 재료를 바탕으로 악·가·무가 한몸처럼 움직이는 무대를 지향해 왔습니다. 소리꾼만 앞에 서고 나머지가 배경으로 물러나는 방식이 아니라, 연주자 모두가 음악의 서사를 함께 밀고 가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는 대금과 아쟁이 서사의 결을 만들고, 어떤 순간에는 장단이 몸의 반응을 먼저 이끌며, 또 어떤 순간에는 바라지소리 자체가 주선율 못지않게 중요한 감정의 축이 됩니다. 이 팀이 전통의 여러 요소를 동시대 감각으로 재구성해 왔다는 평가는 우연이 아닙니다.
 

이 지점에서 ‘신명’은 단지 흥겨움이 아니라, 고립된 개인이 다시 공동의 리듬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이 됩니다. 현대인은 대부분 혼자 감당합니다. 혼자 일하고, 혼자 불안해하고, 혼자 버팁니다. 하지만 장단이 반복되고 강세가 축적되면, 사람의 몸은 생각보다 먼저 반응합니다. 발끝이 박자를 따라가고, 호흡은 조금 더 깊어지며, 가슴은 소리의 진동과 보폭을 맞춥니다. 이때 청중은 음악을 ‘듣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음악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살아 있다는 감각은 바로 이런 순간에 가장 직접적으로 확인됩니다.
 

여기서 전통음악의 농음과 시김새는 결정적입니다. 표준화된 음 하나를 정확히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음과 음 사이를 떨고 휘고 스미듯 지나가면서 감정의 결을 만듭니다. 인공지능은 이 파형을 분석할 수는 있겠지만, 왜 그날 그 자리에서 조금 더 길게 끌어야 했는지, 왜 한 호흡을 더 미뤄야 했는지, 왜 같은 음도 어떤 날은 간절하고 어떤 날은 담담해야 하는지까지는 몸의 사연 없이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예술의 차이는 출력물의 품질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삶을 통과해 나왔는가에서 생깁니다.
 

전통은 뒤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버티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바라지축원이 AI 시대에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전통이 좋다”거나 “기계보다 인간이 낫다”는 감상적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훨씬 더 구체적인 질문입니다. 기술이 점점 더 많은 일을 대신하는 시대에, 끝내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행위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바라지는 그 답을 소리로 보여줍니다. 함께 슬퍼하는 일, 함께 비는 일, 함께 호흡하는 일, 그리고 누군가의 삶을 곁에서 떠받치는 일이야말로 인간 문명의 가장 오래되고도 가장 미래적인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전통은 과거를 복제하는 기술이 아니다. 전통은 인간이 반복해서 겪는 슬픔과 기쁨, 탄생과 죽음, 상실과 회복을 견디기 위해 축적해 온 삶의 형식이다/

실제로 바라지는 전통의 원형을 존중하면서도 그것을 현재의 감각으로 번역해 온 팀입니다. 전라도 지역 무속음악과 노동요에 기반한 비손, 진도씻김굿과 동해안별신굿, 판소리와 산조의 재료를 새롭게 엮은 작업들은 국내외 무대에서도 주목을 받아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수상이나 초청 경력 자체가 아니라, 이들이 전통을 박물관의 유물로 두지 않고 지금의 관객과 호흡하는 언어로 바꾸는 데 성공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전통은 과거를 복제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전통은 인간이 반복해서 겪는 슬픔과 기쁨, 탄생과 죽음, 상실과 회복을 견디기 위해 축적해 온 삶의 형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라지축원은 옛것을 보여주는 공연이 아니라, 앞으로의 시대에 무엇이 끝내 인간에게 남아야 하는지를 묻는 공연입니다. 더 빠른 계산, 더 정교한 추천, 더 완전한 생성이 가능해질수록, 우리는 오히려 더 절실하게 서로의 안녕을 빌어 주는 존재여야 합니다.
 

바라지의 무대가 오래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감탄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묻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의 삶을 조용히 떠받쳐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상실한 사람 곁에 말없이 머물러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누군가의 안녕을 진심으로 빌어 본 적이 있습니까. 기술은 삶을 편리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 비는 마음까지 자동화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 불가능성 속에 인간 예술의 마지막 가치가 있습니다.
 

전통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 아니라, 미래를 견디게 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바라지축원은 그 힘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설명이 아니라 울림으로 증명합니다.

조선규 | 칼럼니스트  

조선규 칼럼니스트

 

35여 년간 교육과 기업 경영, 그리고 지역 사회 발전의 현장에서 사람과 함께 성장해왔다. “삶의 문제는 결국 사람의 문제”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교육을 통해 변화를 만들고, 기업을 통해 길을 열었으며, 현재는 사회 곳곳의 다양한 문제를 함께 풀어가며 더 따뜻하고 공정한 미래를 그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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