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의 그림이야기 18] 국수 누르는 모양 (김기준)

일본의 유명 소설 '우동 한 그릇'이란 단편 소설이 있다. '구리 료헤이'가 실화를 바탕으로 쓴 단편소설로 1988년 한 라디오 방송에 소개되면서 유명해졌다. 소설의 내용은 이러하다. 매년 섣달그믐 밤이면 손님들이 다 나갔을 시간에 세 모자가 찾아와 소바(일본 메밀국수) 한 그릇만 시켜 놓고 셋이 나눠먹는 사람들이 있었다. 매년 그러했다. 매년 섣달그믐날 밤이면 세 모자는 우동집을 들러 소바 한 그릇만 시켜 먹고 가곤 한 것이다.
해마다 찾아와 한 그릇으로 세명이 같이 먹는 세 모자가 안쓰러워서 우동집 사장(겸 주방장)의 부인은 "한 그릇은 서비스로 하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장은 "그런 거 없다"라고 하면서도 면을 삶을 때 면 한 그릇에 1.5인분의 양을 넣어 이들에게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릇에 2인분 이상 담으면 티가 나서 가족들이 부담스러워할까 봐였다. 이들의 자존심을 최대한 살려주려는 의도였다.
사연인즉, 이들은 원래 평범한 가정의 구성원이었으나 어느 날 택배기사인 남편이 운반 도중 자신의 잘못으로 교통사고를 내고 세상을 떠났다. 불행히도 이 교통사고로 8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다. 남은 가족들은 피해자들에게 배상액을 갚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다. 온갖 고생을 하며 돈을 벌어 배상을 하다 보니 어머니의 몸이 약해지고 아프게 되었다. 이 때문에 형은 중학교에 들어서자 신문, 우유 배달을 하며 살림에 보탰고, 동생은 집안일을 담당하였다.
세 모자는 죽을 고생고생하며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다 할 수 있었고, 이해 섣달그믐에 이들은 두 그릇의 소바를 시켰던 것이다. 이들이 배상을 다하고 소바를 먹는 날 동생은 우동집 주인이 양을 널려 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먹고 싶은 소바를 양껏 먹고 싶었던 건지, "나중에 일본에서 제일가는 소바 가게 주인이 되겠다"라는 꿈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한다. 이 꿈 이야기는 엿들은 우동집 주인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
이런 일이 있는 다음 해부터 세 모자는 우동집을 찾아오지 않았다. 우동집 주인은 세월이 흘러 가게를 새롭게 꾸몄지만, 그때 세 모자가 앉았던 테이블만 바꾸지 않고 놔두었고 이 사연은 유명해진다. 어느 해 섣달그믐날, 주인 부부는 이번에도 예약석에 손님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날 밤에 청년이 된 아들들과 어머니가 다시 찾아오게 된다. 그리고 호화스럽게도 소바 3그릇을 시켰다. 잠시 멍하니 있었던 사장은 '당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손님이 왔는데 주문 안 받고 뭐 하냐'는 손님의 충고에 정신을 차리고 세 모자의 주문을 받아들인다.
수십 년이 흘러 두 아들이 장성하여 할머니가 된 어머니와 함께 우동집을 다시 찾아와 '인생 최고의 사치'인 소바 3그릇을 주문하게 되었고, 마침내 오랫동안 올라가 있던 '예약석' 팻말이 치워지게 된다. 이 무렵 형은 의사가 되었고, 동생은 처음엔 소바 가게를 열 생각이었지만 동경 지부의 은행원으로 일을 한다고 언급된다.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우동 한 그릇, 작지만 큰 그릇이다. 이들의 자존심을 지켜주면서도 사려 깊은 우동집 사장의 마음을 이들이 왜 몰랐겠는가? 아마도 이들 세 모자는 가락국숫집 주인의 사려 깊은 생각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장성해 성공할 수 있었고 호화스러운 3 그릇의 소바를 시켰을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지만 소설이기에 어느 정도 각색은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소바 한 그릇, 우리말로 번안되어 우동(가락국수) 한 그릇으로 알려진 이 이야기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우동 한 그릇의 우동집 주인처럼 살아가는 국수 명인이 있어 소개한다. 그는 다름 아닌 (주)면누리의 임희창 회장이다. 임희창 회장은 국수 명인으로 생면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며, 기술 개발을 통해 트렌드에 맞는 숙면(熟麵)을 개발하여 국수의 대중화를 이루겠다는 꿈을 가진 사업가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곡물을 이용한 먹거리에 관심을 가지며, 곡물을 면류(麵類)에 접목시켜, 면류(麵類)는 밀가루라는 부정적이 인식을 불식시키며, 면류의 고급화와 면을 즐기는 사람들의 건강까지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다년간 면(麵)에 대한 특성과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해 온 인물이다.
면제품 연구 개발과 생산에 30여 년의 시간을 보내며 어느덧 국수 명인이 되었고, 그가 운영하는 (주)면누리와 (주)용인면누리는 국내 최대 국수 생산 설비를 갖춘 회사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특히, 특허를 기반으로 하는 자동설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다. 이미 중화면, 칼국수, 우동면, 메밀면, 소면, 미역국수, 클로렐라면, 생라면, 반죽면 등과 같은 생면(生麵)에 대한 기술력은 국내에서 최고로 인정받고 있으며, 또한 연구개발을 통해 일상이 바쁜 국민들에게 보다 빠르고, 보다 맛있고, 보다 영양가 높은 고급 면을 공급하기 위해 숙면 기술을 개발하여 제품의 출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주)면누리에서 개발한 숙면(熟麵)은 면(麵)을 익히거나 삶는 등 재래식 방법이 아닌 새로운 (주)면누리 만의 특허 방식으로 만들기에 조리시간을 단축 할 수 있고 또한 면의 변질을 막아 맛과 영양분의 손실이 없도록 개발한 것이다. (특허 출원서 P24354), 이렇게 만들어진 숙면(熟麵)은 냉동, 냉장, 실온에서의 보관이나 저장이 가능하여 유통기간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 기술로 만든 숙면(熟麵)은 이미 홍콩 등으로 수출이 시작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주)면누리의 회장이자 국수 명인인 임희창 명인은 제품의 연구개발과 생산보다도 사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부담 없이 면 요리를 즐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더 많다. 아직도 돈이 없어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이 많고, 또 평균 만원 이상하는 식사 요금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기에 이런 고민을 풀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시작하는 프로젝트가 '국수 한 그릇' 프로젝트이다. 아직 가격을 정하진 못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이 든 어르신들, 그리고 경제적 수입이 없는 청년들에게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싼 가격에 먹게 하겠다는 계획이다. 일본 소설가 '구리 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이란 소설에서처럼 먹고 싶지만 마음껏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은 작지만 큰 위안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롯 돈은 없지만 자존심을 지키며 내일을 위해 달려갈 청년들, 은퇴 후 자식들에 손을 벌리며 '나 때'를 이야기하는 어르신들에게 편하고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국수 한 그릇' 은 한 끼 식사를 제공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일이다. (주)면누리의 임희창 회장은 이 프로젝트가 잘 안착되길 위해 오늘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위 그림은 조선 말기 풍속화로 면을 만드는 모습을 그린 '국수 누르는 모양'이란 풍속화를 남겼다. 원산, 제물포, 초량과 같은 개항장에서 상인이나 선교사들에게 그림을 팔 목적으로 그린 풍속화이다. 고종의 외교 고문이었던 묄렌도르프가 고종으로부터 선물로 받았다고 전해진다.
현대에 와서 국수 만들기는 (주)면누리에서와 같이 자동화 설비를 통해 만들어지지만, 두 장정이 국수틀을 이용해 국수를 만드는 모습이 그림에 묘사된 '국수 누르는 모양'을 보면 당시 국수 만드는 일이 매우 고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진지한 표정을 한 채로 사람이 줄에 매달린 이유는 가는 국수를 내리기 위함이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장정이 매달아 놓은 줄에 의지한 채 지렛대에 등을 대고 반동을 이용하는데, 이 과정에서는 힘과 요령이 두루 필요하여 ‘국수 뽑는 기술자’라는 말도 생겼다. 이렇게 해서 나온 국수사리는 바로 펄펄 끓는 솥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국수 공방의 사장인 듯한 방 안의 주모는 곰방대를 물고 이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고, 다른 한 장정은 가마솥 앞에서 국수가 잘 삶아지게 막대기로 휘젓고 있다.
이렇게 힘과 요령으로 만드어 지던 국수는 이제 최신의 자동 설비로 만들어진다. '매천집'과, '동국이상국집'에는 아이가 태어난 지 3일째 되는 날에 축하하러 온 손님들에게 국수를 대접한다는 풍속이 적혀 있다. 이렇듯 국수는 돌잔치, 생일, 회갑연 등 축하 자리는 물론이고, 제례 등의 추모를 위한 자리에서도 쓰이는 중요한 음식이었다. 잔칫날 국수를 함께 먹음으로써 수복을 기원하기도 하고, 음복을 통해 서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이 귀한 국수가 이제는 누구나 먹을 수 있는 대중 음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