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살아내 주겠니! _ 최숙미
살아내 주겠니!
최숙미
철퍼덕 내던져진 절망이다. 현실이 아니기를. 잘못 들었기를. 가짜 뉴스이기를. 유명 배우가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뉴스는 눈을 헤집고 귀를 쑤셔대며 사실임을 까발려댄다. 천하에 알려 진 인생이 무너지니 자살만이 답이라 여겼을까.

앞이 캄캄해도 아무런 희망이 없어도 조금만 살아내 주겠냐고. 몇 시간만 더, 하루만 더 살아내 주겠냐고. 그 며칠 사이만 살아내 준다면 숨이 쉬어질 거라고. 진저리친 일이었다고 내뱉을 수 있는 날까지 살아내 주기를 바랐으나, 또 이미 늦어버렸다.
진실을 진실로 받아주지 않는 수사로 인해 또 한 사람이 자신을 죽였다. 누군가에게 참으로 소중한, 스타로만 바라보는 일반인들에게도 아까운, 자신에게 존귀한 한 생명이 내린 결단에 모두는 망연자실이다. 마약 검사에서 음성이 나왔으면 마약 하지 않은 거지. 과학적 근거 외에 무엇을 더 검사하나. 진실이 왜곡되는 과정이면 어느 누가 견뎌낼까. 희생양이 나와야만 수사가 마무리되는 건지. 진실은 진실이고 수사는 수사인가. 진실이 헌신짝이면 수사는 금배지인가. 수사 기술 한번 거창하다. 수사가 직접이든 간접이든 죽음으로 몰아갈 일은 아니지 않나.
삶이 녹록지 않으니 살다 보면 죽어야만 고통이 끝날 것 같은 때가 있다. 암담하고 참담하고 무기력해지는 순간이다. 나는 문 닫힌 교회 계단에서 펑펑 울었던 적이 있다. 마지막 살 희망이 있을까 해서 찾아간 곳이었다. 살 소망이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알고 있던 교회마저 나를 저버린다는 생각이 미치자, 더는 걸어 볼 희망이 없어 다른 길을 찾고야 말았다. 죽어버리자. 죽는 게 길이 되니 마음이 편해졌다. 이러면 될 것을. 어떻게 죽을까를 골몰하는 나날. 웃기고 슬픈 생각이지만 만일 살아서 교회에 간다면 문 열어 놓은 교회에 가리라고 다짐했다.
우리 집안은 사막에 내몰린 꼴이었다. 조현병 시누이에 일곱 식구 유일한 벌이인 남편 사업은 바닥을 쳤다. 가족들은 서로를 원망하고 다섯 살 아들은 어른들 눈치 보느라 원형 탈모가 생겼다. 갓 젖 뗀 딸아이만 할머니 품에서 된장국을 받아먹고 포동포동해졌다. 나는 불면증에 시달리며 위는 솜뭉치 같은 게 치받쳐 배고프지 않았다. 앉아서 쓰러져도 누구 하나 신경 쓰는 이 없었다. 남편은 술을 먹고 업보라며 울부짖고 어금니가 부러지도록 앙다물고 버티던 시어머니는 어떡하냐고 통곡하고, 시아버지는 집안에 사람 잘못 들여서라며 밥상 뒤집고 가출해서 돌아오지 않았다. 호적상 가족들의 불협화음에 흩어지지도 못하고 눈이 떠지니 살았던 나날. 아파도 아플 수 없었던 시어머니가 아이들 끼고 사니 다행이라 할까.
당시 남편도 나만큼이나 무기력해 있었다. 누구와도 말하지 않고 무협지만 읽었다. 며칠 만에 출근한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다정하게 받았다. 그것마저 싫었다. 살면서 욕을 해 본 기억이 없으나 작심하고 “당신은 개새끼”라고 욕을 하니 남편은 “응”이라 했다. 전화를 끊어버렸다. 살게도 죽게도 하지 않는 남편. 같이 욕을 했어야지 무슨 “응”이냐고. 암울한 분위기에도 아이들은 웃었고 시어머니는 살아냈다. 나는 어떤 역할도 존재 의미도 없었다. 무기력했으나 음성적인 선택에는 빠르게 반응했다.
솜뭉치 같은 위를 끌어안고 연탄불에 만두를 구워 파는 노점상 할머니 앞에 앉았다. 노릇노릇 익는 군만두를 먹을까 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눈물이 흘렀다. 할머니가 알만하다는 듯 혀를 찼다. 무엇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고 울기만 했다. 무기력했는데 어쩌다가 모르는 할머니 앞에서 울 수가 있었는지. 살 운명이었을까. 할머니의 혀 차는 소리에 온갖 시름을 늘어놨다. 아이들이 불쌍한데 아무 짓도 하지 못한다고. 약국에선 화병이라고 잠을 못 자면 밤마다 술을 조금씩 마시란다고. 친정은 멀고 이웃도 친구도 없던 내가 얼마나 많은 말을 했는지.
“아기 엄마, 실컷 울어버려. 살다 보믄 언제 그랬나 싶은 날도 오니라.”

꺼이꺼이 울었고 할머니가 자꾸만 건네던 만두는 먹지 못했다. 장사도 못하고 내 울음을 받아준 할머니였건만 부끄럽고 죄송해서 다시 가지 못했다. 고마웠다고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지금도 죄송하다. 그때의 노점상 할머니는 나를 살아내게 해 준 구원자였다고 확신한다.
그 할머니 앞에서 울어버리고 살아내서 지금껏 산다. 생을 스스로 정지시킨 그들처럼 이 방법뿐이라고 생각했던 때였으나, 극단적 행동을 하지 않았더니 오늘을 괜찮게 산다. 아니 감사하면서 산다. 죽을 이유는 다르나 같은 극단에 섰던 사람으로 부탁한다. 오늘을 살아내 달라고. 결심 선 순간을 잠시 미루라고. 그 순간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라고. 이미 바닥은 쳤고, 눈이 떠지면 뜨고 감기면 감으라고. 그게 살아내는 거라고. 그 순간을 살아내 준다면 인생 어딘가는 나를 위한 일들이 있기 마련이라고. 내가 살아내야 가족이 살고 가정이 살고 사회가 사는 거라고.
어느 목사님이 동네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데 옆 테이블 청년이 자꾸 힐끔거리더란다. 큰 교회 목사라서 아는가 보다고 예사로 여기고 식당을 나왔는데 몇 시간 후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단다. 알아보니 아침에 본 그 청년이었다고. 마지막 구원의 눈길을 외면한 자신을 평생 자책하노라고 했다. 극단을 선택한 청년의 외로움에 목이 멨다. 마지막 용기라도 내봤으면 살았을 것을.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도 노점상 군만두 할머니 같은 구원자는 있게 마련인 것을.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나 사람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극단의 결심을 하는 이들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살아내 주겠니!” 라고. 살아내 주라고 달래기에 늦은 순간이면 성경 구절로 외친다.
살아 있으라! 피투성이라도 살아있으라!
최숙미 수필가 소설가

계간『에세이문예』 수필 등단, 월간『한국소설』 단편소설 등단
한국문인협회부천지부회장, 수주문학상 운영위원, 부천디아스포라문학상 운영위원
수필집『칼 가는 남자』 『까치울역입니다』 소설집『데이지꽃 면사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