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출판/인문
[ 강영임의 시조 읽기]

【강영임의 시조 읽기 32】 박희정의 "일몰"

시인 강영임 기자
입력
일몰 / 박희정 이미지: 강영임기자
일몰 / 박희정 [이미지: 강영임기자]

일몰

 

박희정

 

기울수록 뜨거워졌다, 저 붉은 동그라미

낮 동안 또 한 사람 다부지게 데워놓고

기어이 수평선 안고 자진하듯 넘어갔다

내게서 지는 것은 태양만이 아니리라

넣어둔 옷가지처럼 묻어둔 이름처럼

또 다른 미쁜 테마로 너는 자꾸 부푼다

아침이 올 때까지 의식은 한 뼘 자라

그리움의 시공간을 공그르고 매듭지며

저무는 나를 꺼내서 청춘이라 불렀다

 

『말랑말랑한 그늘』 (2025. 현대시학)


해 질 무렵 태양은 하루를 다 소진했음에도 더 붉고 뜨겁다.

 

세월은 많은 것을 가져간다. 젊은 날의 날랜 몸, 자고나면 회복되던 기운, 미래를 두려움 없이 껴안던 자신감. 태양은 낮 동안 세상을 데워주다 마지막을 향해 더 치열하게 타오른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마음속 열망이 커지는 우리의 모습처럼.

 

시인에게서 지는 것은 해만이 아니다. 세월 속에 넣어둔 옷가지들, 마음 깊숙이 묻어둔 이름들, 그 모든 것들이 저물어가는 해와 함께 저 너머로 넘어간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삶의 다른 방식의 시작이다. 묻어둔 기억, 눌러두었던 사랑과 꿈이 다시금 부풀어 오른다. 밤의 어둠 속에서 더욱 또렷하게 빛나는 별처럼, 나이가 들수록 선명해지는 꿈들이 있다.

 

아침이 올 때까지 의식은 조금씩 자란다. 그리움과 추억을 엮어 하나의 매듭을 만들 듯 마음속에는 여전히 새로운 가능성이 깃든다. 젊은 날에 몰랐던 기다림의 깊이, 소소한 것들에 느껴지는 설렘, 하루하루 새겨지는 의미가 지금의 시간을 만든다.

 

「일몰」은 태양이 낮에서 밤으로 저무는 시간성을 개인의 생애와 연결해 지는 것속에 다시 피어나는 청춘을 그려낸다. “내게서 지는 것은 태양만이 아니리라”처럼 사라짐은 끝이 아닌 새로운 의미의 시작으로 전환한다. 이는 상실과 생성이 공존하는 미학인 동시에, 삶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저무는 나청춘이라 명명하며 나이 듦과 젊음, 저물어감과 떠오름을 동시에 품어내는 역설적 긴장을 통해 시의 사유를 깊게 만든다.

 

몸은 늙어가지만 마음은 여전히 꿈을 품고 사랑을 갈망하며, 내일을 향해 걸어간다. 저물어야 다시 떠오르는 해처럼 우리는 우리 안에 청춘을 새롭게 떠올린다. 여전히 해 질 녘에 태양처럼 뜨겁고 단단하게 살아내고 싶은 것이다.

 

우리들은…

 

강영임 시인, 코리아트뉴스 전문 기자

 

강영임시인
강영임시인

 

2022년 고산문학대상 신인상 수상.
2025년 제1회 소해시조창작지원금 수상
시집 『시간은 한 생을 벗고도 오므린 꽃잎 같다』
 
[편집자주: "강영임의 시조 읽기"는 매주 수요일 아침에 게재됩니다]
시인 강영임 기자
share-band
밴드
URL복사
#박희정시인#강영임시인#일몰#강영임의시조읽기#시조해설#좋은시조#멍품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