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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65] 윤후명의 "강원도의 나귀"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65] 윤후명의 "강원도의 나귀"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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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강원도의 나귀

 

윤후명

 

강원도 숲길을 가다가

나귀와 마주쳤다

나귀를 본 마지막이었다

나귀는 어디서 왜 나타났을까

흰 나귀는 아니니까 백석(白石) 시인의 나귀는 분명 아니지만

응앙응앙울지도 않았지만

쫄랑쫄랑 가며 목방울을 흔들었다

내 입산을 환영한다고

대관령 어느 구석에서 부랴부랴 온 것일까

그러나 나는 결국 보름 만에 입산도 하지 못하고

숲속에서 물러나왔다

그 우여곡절을 다시 말하지는 않고

다만 어디에 몇 줄 쓴 것으로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 뒤로 나귀는 내 눈에 띄지 않았다

한 풍경이 내게 문을 닫은 것이다

언제 다시 나귀를 만나게 될까

강원도의 나귀는 더욱 아득하다

이 세계가 이제 내게서 저물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 세계 앞에서 내가 응앙응앙울며

사라질 차례인 것이다

 

—『강릉길, 어디인가』(문학나무, 2024)

 

  

강원도의 나귀 [ 이미지 : 류우강 기자]

  [해설

 

  강원도의 나귀를 못 보게 됨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윤후명 소설가는 애당초 시로 등단했고 첫 작품집도 시집이었다.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된 1979년 이후 소설 쓰기에 주력하지만 시단을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었다. 애당초 시 동인 ‘70년대를 강은교ㆍ김형영ㆍ석지현ㆍ정희성과 만들어 활동하였고 2000년대에 다시 뭉쳐 동인지를 여러 권 냈다. 20241월에 제5시집 『강릉길, 어디인가』를 냈다.

 

  이 시집에는 자신이 강릉사람임을 천명한 내용이 다수 들어가 있는데 제목에 강릉이 들어가 있는 것만 해도 6편이다. 언젠가 숲길에서 나귀와 마주쳤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강원도 산골짜기에 들어가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집을 구했지만 보름 만에 나왔나 보다. 서울에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 그랬을까 소설이 잘 안 되어 그랬을까. 그런데 강원도를 떠나온 이후 그 나귀가 자꾸만 생각나는 것이었다.

 

  나귀건 조랑말이건, 제주마건 한라마건 말이란 말은 다 착하게 생겼다. 대개의 말은 천성이 순해서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전 전쟁터에선 말이 중요한 이동수단이자 운송수단이었다. 그래서 많이 죽거나 다쳤을 것이다. 한국의 당나귀는 다 백석 시인의 것이지만 윤후명은 그것에 대해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숲길에서 만난 그날 이후 못 보게 된 강원도의 나귀를 윤후명은 간간이 생각했던 것인데, 결국 다시는 보지 못하고 만다. 나한테서 나귀가 영영 사라진 것처럼 이 세계가 이제 내게서 저물 것이란 예감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이제는 이 세계 앞에서 내가 응앙응앙울며/ 사라질 차례인 것이다에 이르게 된다. 모든 생명체의 운명은 사라지는 것이니, 백석도 나귀도 사라졌고 이제 내가 사라질 차례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올해 58일에 윤후명 나귀의 혼은 강원도 강릉으로 갔다. 바로 그 6개월 전인 작년 126일에 선생님과 활짝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는데. 선생님이 가신 지 이제 3개월이 되었다. 늘 웃거나 미소짓는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늘따라 정말 보고 싶다. 70년대 시문학사를 정리하면서 그의 작업이 80년대에 들어서서부터는 종결되고 만 느낌이 있다고 하면서 안타까움을 표시했더니 1992년에 내게 『홀로 상처 위에 등불을 켜다』를 부쳐주시면서 종결되지 않음이라고 메모지를 넣어 보내주셨다. 이 일 이후부터 나는 윤후명 선생님을 뵈면 윤상규 시인님이라고 장난삼아 불렀고 선생님은 소설 쓰지 않는 나를 이승하 작가라고 짓궂게 부르곤 했다.

윤후명 시인 (좌측)과 함께 [이승하 시인 제공]

  [윤후명 시인]

 

  1946년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철학과 졸업.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 당선 때의 이름은 본명 윤상규였고 소설 당선 때의 이름은 필명 윤후명이었다. 시집 『명궁』『홀로 상처 위에 등불을 켜다』『쇠물닭의 책』『비단길 편지』『강릉길, 어디인가』, 육필시집 『먼지 같은 사랑』, 시선집 『강릉 별빛』, 산문집 『꽃』, 화서집 『윤후명 그리고 쓰다』를 냈다.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동리문학상, 31문화상 예술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 계간 《문학나무》 편집고문 역임.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시와시학상편운상가톨릭문학상유심작품상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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