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해설] 박정희의 "쭈꾸미를 먹으며"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82]
쭈꾸미를 먹으며
박정희
원래 내 이름은 ‘주꾸마’인데 끝에 ‘마’자를 빨판이 세기로 유명한 문어 할아버지가 떼어 버려 ‘주꾸미’가 되었어요 언제부터인지 ‘쭈꾸미’라고 모두들 부르지요
문자깨나 하시는 우리 할아버지는 문어이고요 손바닥만 한 석회질 품고 있다고 갑질한다는 갑오징어가 아버지예요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는 형 이름은 낙지랍니다 꼴뚜기는 내 동생인데 가장 친한 친구가 망둥이라네요
문자를 보내고 먹물도 쏘아보고 물고기와 놀아봐도 어부들은 우리 삼대를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녀요 잔머리 한 올 안 굴리고 훅 뜨거운 숨에 또 넘어가 나도 모르게 허연 접시에 화끈하게 눕게 되네요
시詩의 집을 짓고 있는 시 마을 사람들이 왔는데요 매운 것을 통 못 먹는 설계사는 순한 맛으로 시켜 먹고도 불이 몸에 닿은 듯 발을 동동 구르더라고요 오지게 맵다며 떠듬떠듬하는 말이 매운 통증을 빨리 없애려고 거의 씹지 않고 삼켰다네요 잔잔하던 저수지가 잠깐 휘청하더래요
이 정도는 매운 축에도 안 든다며 달게 비운 여인 입 한 번 달싹 안 하고 새초롬하게 앉아 있더라고요 쭈꾸미네 다녀간 그 마을 사람들 매콤한 점심에 오늘의 문장이 얼얼하겠습니다
—『가을을 조심하세요』(도서출판 실천, 2025)

[해설]
‘주꾸마’는 원래 ‘〜해줄게’라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다. 주꾸미와 쭈꾸미란 말의 유래 설명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려서 망설이게 된다. 아무튼 문어와 더불어 갑오징어, 낙지, 꼴뚜기, 망둥이 등이 다 제 잘난 맛에 바다를 누비며 살다가 어부에게 잡혀 와서 요리가 된다. 다 문어(文魚)와 사촌지간이다. 文魚와 文人은 무언가 통한다. 문어는 먹물을 갖고 있기에 文魚인 것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시가 있다니! 이야기꾼의 재담에 귀를 기울이다 혀를 내두르게 된다. 텔레비전의 개그 프로도 이보다 더 재미있을 수는 없다. 그런데 시는 제4연부터 분위기를 확 바꾼다. 문어-먹물-문자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게 하더니 바로 “시의 집을 짓고 사는 시 마을 사람들이 왔는데요” 하면서 시 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매운 것을 통 못 먹는 시의 설계사는 순한 맛으로 시켜 먹고도 불이 몸에 닿은 듯 발을 동동 구른다. 시 쓰기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만끽하고 있다.
이처럼 쭈꾸미 먹는 행위에 빗대어 얼얼하게 매운 시 한 편을 쓸 결심을 단단히 하는 박정희 시인을 만나게 된다. 쭈꾸미 얘기를 하다가 등단 6년 만에 첫 시집을 내는 자신의 시에 대한 각오를 이와 같이 맹렬히 편다.
시를 쓴다는 것은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다. 매운 것을 먹을 때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도대체 얼마나 시가 매웠으면 점심에 먹은 것이 혀를 다 얼얼하게 할까. 에라잇, 허풍쟁이 같으니라고. 독자는 껄껄 웃으면서 다음 시로 넘어가게 된다. 『가을을 조심하세요』는 자유시 40편과 디카시 30편이 실린 아주 특이하고 유쾌한 시집이다. 첫 시집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편편의 시가 세련되어 있고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노련하다.
[박정희 시인]
2019년 《문학에스프리》로 등단하였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중앙대학교 평생교육원 시창작반을 수료하였다. 대통령과 이름이 같아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고진감래(苦盡甘來)! 박정희 시인의 시대가 곧 올 것이다. 디카시의 새로운 경지를 열면서.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