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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안개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았던 이유

임만택 전문 기자
입력
2015년 7월 15일, 청계산에서 배운 동행의 의미

2026년 7월, 다시 장마철이 찾아왔다. 비는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고, 때때로 거센 바람이 창문을 두드린다. 눅눅한 공기와 낮게 드리운 구름을 바라보고 있으면 오래전 한여름의 산행이 떠오른다.

2015.7.15 청계산, 안개가 자욱하다. 앞이 안보인다.

2015년 7월 15일이었다.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던 날, 친한 지인과 함께 청계산을 찾았다. 맑고 화창한 날의 산행과는 처음부터 분위기가 달랐다. 빗물을 머금은 나뭇잎은 짙은 녹색으로 빛났고, 흙길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산 아래에서는 그저 흐린 날씨라고 생각했지만, 산길을 오를수록 연무는 점점 짙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풍경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앞서 걷는 사람의 모습마저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다. 나무들은 검은 윤곽만 남긴 채 서 있었고, 익숙해야 할 산길은 전혀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처럼 느껴졌다.

 

평소라면 멀리 보이는 능선이나 산 아래 풍경을 바라보며 현재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한 치 앞도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웠다. 몇 걸음 앞의 길만 겨우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 때마다 물방울이 빗물처럼 쏟아졌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선 소리들은 안개 속에서 더욱 크게 다가왔다.

 

혼자였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두려움이 먼저 찾아왔을 것이다.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닌지, 더 올라가도 되는지,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단순히 시야가 가려진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불안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날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걷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특별히 많은 말을 나눈 것도 아니었다.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자”, “조금만 더 가보자”, “천천히 가도 괜찮다”는 짧은 말들이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말들은 짙은 안개 속에서 길을 알려주는 작은 표지판과 같았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서로의 기척은 느낄 수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속도를 맞추고, 가파른 길에서는 먼저 오른 사람이 뒤따르는 사람을 기다렸다. 미끄러운 돌과 나무뿌리를 발견하면 서로 알려주었다. 혼자였다면 불안 때문에 더 서둘렀을 길을, 우리는 오히려 천천히 걸었다.

 

그날 산에서 의지한다는 말의 의미를 새롭게 알게 됐다.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모든 판단을 맡기거나 무조건 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같은 방향으로 걷는 일이다. 한 사람이 지칠 때 다른 사람이 잠시 기다려주고, 길이 분명하지 않을 때 함께 살펴보는 것이다. 때로는 아무 말 없이 곁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삶 역시 장마철 산행과 닮아 있다.

 

우리는 언제나 멀리까지 내다보며 살아가고 싶어 한다. 내가 선택한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지금의 노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확실히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인생은 좀처럼 전체 길을 미리 보여주지 않는다. 때로는 안개가 내려앉고, 비바람이 불며, 불과 몇 걸음 앞조차 보이지 않는 시기가 찾아온다.

 

그럴 때 사람은 길보다 먼저 자신을 의심한다.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지금까지의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혼자 뒤처진 것은 아닌지 두려워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불분명한 순간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지금 보이는 만큼만 걸어가는 것이다.

 

산 전체가 보이지 않아도 바로 앞의 돌 하나는 확인할 수 있다. 정상까지의 거리를 알 수 없어도 다음 발을 어디에 디뎌야 하는지는 살필 수 있다. 한 걸음이 쌓이면 길이 되고, 그 길을 함께 걷는 사람이 있다면 두려움은 견딜 만한 것이 된다.

 

2015년 7월 15일 사진에는 당시의 공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짙은 연무와 축축한 숲, 길 가장자리를 덮은 초록의 식물들, 그리고 오른쪽 아래로 보이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 인상적이다.

 

사진 속 인물은 거대한 자연에 비하면 아주 작다.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좁은 길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그 작은 뒷모습이 있기에 사진은 막막함만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가 먼저 걷고 있다는 안도감, 뒤따라갈 사람이 있다는 믿음을 전한다.

 

혼자였다면 두려움으로 가득했을 풍경이, 동행이 있었기에 추억이 됐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중에는 맑은 날의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비바람 속에서 우산을 나누어 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오래 기억되는 사람은 아마도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곁에 있었던 사람일 것이다.

 

길을 완벽하게 알고 있어서가 아니다. 자신 역시 두렵고 힘들지만 함께 걸어주었기 때문이다. 답을 알려주지는 못해도 옆에 머물러주고, 넘어질 때 손을 내밀어주며,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고 말해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장마는 해마다 돌아온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며, 산과 도시 위로 짙은 구름이 드리운다. 우리의 삶에도 그런 계절은 반복된다. 계획이 흔들리고 관계가 어려워지며, 미래가 안개 속에 가려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 필요한 것은 멀리까지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아닐지도 모른다. 바로 옆 사람의 존재를 믿고, 지금 보이는 한 걸음을 내딛는 용기일 것이다.

 

안개가 아무리 짙어도 길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단지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걷고 있다면,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먼 곳까지 갈 수 있다.

 

2015년 장마철의 청계산에서 나는 정상에 오르는 법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배웠다.

 

삶의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확신이 아니라 신뢰이며,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운 순간에도 누군가와 함께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이라는 것을.

임만택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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