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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평론] 고통스러운 실존의 여정, 류재기의 '맨발의 순례자'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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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평론] 고통스러운 실존의 여정, 류재기의 '맨발의 순례자'를 읽고

이삭빛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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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빛 시인 문학평론가

 


분수처럼 쏟아진다
작열하는 태양의 조각들이
방향도 없이
이름 지어진
낙토나 폐허 위에
쓰러진 갈대사이로
맨발 순례자는 멈춰서
살아가는 그 두터운
생존을 확인 하지만
어디메서
살결 태울 것 같은
빛의 충돌이
순례의 몸을 갚아 돈다. 

- 유재기의 ' 맨발의 순례자' 전문 
 

유재기 시인

유재기 시인의 '맨발의 순례자'는 삶의 본질적인 고통과 그 속에서 확인하는 존재의 의미를 묵상하는 깊은 시이다. 시는 눈부시게 쏟아지는 태양의 빛과 그 빛을 온몸으로 감내하는 한 순례자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 마주하는 실존적 번민과 생존의 지난한 과정을 시각적,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낙토(樂土)'와 '폐허(廢墟)'가 한데 뒤섞인 풍경은, 삶의 이중성과 모순을 상징하며, 그 위를 걸어가는 순례자의 고독한 발걸음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운명적 무게를 느끼게 한다. 이 시는 고통 속에서도 굳건히 자신의 길을 가는 존재의 의지를 담담하면서도 힘 있게 노래한다.

 

 

상반된 이미지의 충돌과 실존적 풍경

 

시의 서두는 '분수처럼 쏟아지는' '작열하는 태양의 조각들'이라는 강렬한 이미지로 시작된다. 이는 단순히 자연 현상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삶에 쏟아지는 거대한 운명적 압력이나 시련을 은유한다. 주목할 점은 이 빛이 '방향도 없이' '낙토나 폐허 위에' 쏟아진다는 점이다. 이는 삶의 희비(喜悲)와 무관하게 모든 존재에게 균일하게 가해지는 고통의 보편성을 드러낸다.

 

빛은 일반적으로 희망이나 구원을 상징하지만, 이 시에서는 오히려 순례자의 '살결 태울 것 같은'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낙원과 폐허가 공존하는 이 이중적인 풍경은, 우리 삶이 기쁨과 절망, 성공과 실패가 교차하는 복잡한 지형임을 보여준다. 순례자는 이 상반된 풍경 속에서 자신의 '두터운 생존'을 확인하며, 고통이야말로 살아있음의 가장 확실한 증거임을 역설적으로 깨닫는다. '명암교차(明暗交叉)'의 비유처럼, 삶의 빛과 그림자가 뒤섞인 풍경이 바로 이 시의 무대이며, 그 속에서 순례자는 묵묵히 자신의 실존을 증명해낸다.

 

맨발의 순례자가 선택한 '고통의 확인'

 

시의 제목이자 핵심 주체인 '맨발의 순례자'는 문명의 편리함을 거부하고 날것 그대로의 고통을 감수하는 존재이다. 이는 가식과 허울을 벗어던지고 삶의 맨 얼굴을 직시하려는 순수한 의지를 상징한다. 그는 '쓰러진 갈대사이로' 멈춰 서서 '생존을 확인'한다. 갈대는 시련에 꺾인 연약한 존재들을 의미하며, 순례자는 그들을 보며 자신이 겪는 고통이 결코 개인만의 것이 아닌, 모든 생명이 공유하는 보편적 숙명임을 깨닫는다.

 

그가 확인하는 '두터운 생존'은 단순히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넘어, 삶의 무게와 고통의 깊이를 온몸으로 감각하는 행위이다. 이는 지성적 이해를 넘어선 육체적, 영혼적 깨달음이다. '살결 태울 것 같은' '빛의 충돌'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혹독한 시련을 의미하며, 순례자는 이를 피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그 빛을 '몸을 갚아 돈다'. 이는 고통을 피하려 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 고통을 통해 자신을 정화하고 의미를 얻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우리를 죽이지 않는 것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는 니체의 말처럼, 이 시에서 고통은 순례자를 무너뜨리지 않고 더욱 단단한 존재로 완성시킨다.

 

고통을 통한 존재론적 성찰

 

이 시는 고통을 단순히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은 존재를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자, 더 깊은 실존적 성찰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이다. 태양의 빛이 순례자의 몸을 휘감아 도는 순간은, 순례자가 외부의 시련을 온전히 내면화하고 흡수하여 자신의 존재를 더욱 견고하게 다지는 순간이다.
 

이는 마치 고난을 통해 얻는 성숙과도 같다. 고통 속에서 삶의 진실을 깨닫는 순례자의 모습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내적 순례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탐색해야 함을 암시한다. '두터운 생존'은 얕은 이해가 아닌 깊은 경험과 고통을 통해 얻어진 진실이며, 이는 그 어떤 외부적 가치보다 더 굳건한 존재의 토대가 된다. 이처럼 순례자의 고난은 삶의 근원을 탐구하는 '고진감래(苦盡甘來)'의 과정이며, 이를 통해 그는 존재의 가치를 증명한다.

 

고통의 긍정을 넘어선 순례의 완성

 

'맨발의 순례자'는 고통스러운 길 위에서 비로소 삶의 본질을 깨닫는 존재이다. 시는 무겁고 고통스러운 서정을 담고 있지만, 그 끝에는 고통을 감수하고 길을 나서는 굳건한 순례자의 의지가 자리 잡고 있다. 고통은 끝내 순례의 몸을 감싸 안는 빛이 되며, 이는 곧 고난이 존재를 완성하는 힘이 됨을 시사한다. 이 시는 '맨발 순례자는 멈춰서 / 살아가는 그 두터운 / 생존을 확인 하지만' 이라는 시구처럼, 고통을 직시하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인간의 강인한 실존 의지를 그려낸다.
 

이삭빛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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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빛시인#유재기시인#맨발의순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