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규 칼럼] AI 시대의 역설, 가족기업의 귀환
인공지능과 초고도화된 디지털 기술이 세계 경제의 전면으로 부상한 지금, 경영학계와 산업 현장에서는 이색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첨단 기술의 극단에 선 현대 산업 생태계에서, 역설적이게도 가장 고전적인 경영 형태인 가족기업이 강력한 생존 모델로 재조명받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기업은 오랫동안 온정주의의 온상이자 전근대적 세습의 산물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할수록 제도와 시스템이 보장하지 못하는 공백이 드러나고 있으며,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은 다름 아닌 혈연에 기반한 신뢰라는 자본이다. 가족기업이 어떻게 AI 시대의 격랑을 헤쳐 나갈 최전선으로 거듭나고 있는지, 그 구조적 원인과 경제적 본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피지컬 AI의 시대 도구의 진화가 만든 보안의 파라독스, 첫 번째 변화는 노동시장에서 시작된다. AI의 확산으로 이른바 엔트리 레벨 일자리가 빠르게 줄고 있다. 스탠퍼드대 연구진의 분석에 따르면 AI 노출도가 높은 직군에서 22~25세 청년층 고용은 2022년 말 이후 13% 이상 감소했고, 미국의 신입급 채용 공고는 2023년 1월부터 2025년 6월까지 약 35% 급감했다. 청년층의 취업 난항은 자녀가 부모의 사업체에 합류하는 자발적 또는 타의적 가업 승계를 촉진하고 있다.
그러나 2026년 현재, 이보다 더 근본적인 구조 변화가 진행 중이다. AI가 화면 안의 언어모델을 넘어 로봇의 몸을 입고 공장 바닥으로 내려오는 피지컬 AI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국 정부는 제조업 AI 전환, 이른바 M.AX를 국가 전략으로 설정하고 16조 원 규모의 자금을 공급하며, 2030년까지 500개의 AI 팩토리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1,500여 개 산·학·연이 참여하는 M.AX 얼라이언스까지 결성된 상태다.
여기서 냉정하게 짚어야 할 것이 있다. 피지컬 AI와 AX는 생산성의 축복인 동시에 보안의 재앙이다. 공장에 들어선 지능형 로봇과 자율제조 시스템은 그 자체가 데이터 수집 장치다. 공정의 온도, 압력, 배합 비율 같은 비특허 노하우가 로봇의 센서와 학습 데이터에 고스란히 기록되고, 클라우드와 외부 솔루션 업체의 서버를 경유하는 순간 유출 경로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여기에 카메라와 온디바이스 소형 언어모델을 탑재한 AI 안경까지 보편화되면서, 물리적 출입 통제와 촬영 금지 스티커에 의존하던 전통적 기밀 유지 방식은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수치는 이미 경고등을 켰다. 2025년 경찰청 단속 결과 기술유출 범죄 피해 기업의 86.6%가 중소기업이었고, 유출 주체의 82.7%는 내부인, 즉 피해 기업의 임직원이었다. 대기업은 수조 원 규모의 보안 시스템과 준법 감시 체계로 방어하지만, 중소·중견기업은 AX 전환에 투입할 재원조차 버거운 형편에 보안까지 감당하기 어렵다. 심지어 기술유출 사고의 실제 발생 건수는 공표된 수치의 10배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역설이 성립한다. 피지컬 AI 시대일수록 기술 자산의 가치는 커지는데, 그 자산을 지킬 제도적 방어선은 중소기업일수록 무너진다. 제도적 보안이 한계에 도달한 지점에서, 기업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방어선은 혈연에 기반한 신뢰 자본이다. 핵심 공정을 아는 사람이 가족이라면, 내부인 유출이라는 가장 치명적인 리스크의 확률은 구조적으로 낮아진다. 그리고 부족한 전문성은 AI가 채운다. 기획, 데이터 분석, 마케팅, 재무를 AI가 보조하면 소수의 가족 인력으로도 전문적 경영이 가능하다. 기밀을 아는 사람은 가족으로 좁히고, 반복적 전문 업무는 AI에 맡기는 것. 이것이 피지컬 AI 시대 가족기업의 새로운 운영 공식이다.
데이터가 말하는 생존 구조와 산업적 정합성, 가족기업에 대한 대중적 인식은 비효율성과 족벌 경영의 폐해에 집중되어 있지만, 학술적 데이터가 보여주는 현실은 다르다. 재무학 최고 권위지인 저널 오브 파이낸스에 실린 앤더슨과 리브의 2003년 연구는 S&P 500 기업 중 창업 가문이 지분을 보유한 기업이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회계적 성과와 기업 가치 모두에서 우위를 보임을 입증했으며, 이 논문은 9,000회 이상 인용되며 가족기업 연구의 기준점이 되었다. 저널 오브 파이낸스. 맥킨지의 분석 역시 장기 지향적 기업이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연구개발에 평균 약 50% 더 투자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쟁력의 핵심은 초장기 투자 지평이다. 전문경영인은 분기 실적과 주가, 임기 연장이라는 단기 목표의 압박에 시달린다. 반면 자녀와 손주 세대까지 기업의 존속을 도모하는 가족기업은 단기 주가 변동에 연연하지 않고 세대를 관통하는 연구개발과 체질 개선에 이익을 재투자한다. 70대의 나이에 가문의 사운을 걸고 반도체 투자를 단행한 이병철 회장의 1983년 도쿄 선언이 대표적 사례다.
경제적 비중도 압도적이다. 가족기업은 북미 전체 기업의 80~90%를 차지하고,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국 GDP의 약 54%, 고용의 약 59%를 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포춘 500대 기업의 약 35%가 가족이 지배하는 기업이다. 가족기업은 특이한 예외가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 생태계를 떠받치는 가장 보편적인 주류 모델인 것이다.
물론 모든 산업에서 가족기업이 우위를 점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 패러다임이 끊임없이 번복되는 IT와 빅테크 같은 파괴적 혁신 산업에서는 이전 세대의 유산이 연속성을 갖기 어려우므로 전문경영인 중심의 유연한 구조가 유리하다. 반면 오랜 기간 축적된 기술, 장인정신, 브랜드 신뢰도 자체가 진입장벽을 이루는 전통 제조업, 요식업, 명품, 노포 영역에서는 가업 승계가 대체 불가능한 프리미엄을 창출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국내외의 시각 차이다. 한국은 대형 상장사의 73%, 125곳이 가족기업 범주에 속할 만큼 비중이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소수 지분으로 과도한 지배력을 행사하거나 편법 승계, 일감 몰아주기로 주주 가치를 훼손해 온 경험 탓에 사회적 시선이 냉소적이다. 반면 독일은 상속세법 제13조에 따라 고용 유지와 임금총액 조건을 충족하는 기업 승계에 대해 사업 자산의 85%, 조건이 엄격할 경우 100%까지 상속·증여세를 면제해 일본은 법인판 사업승계 세제를 통해 승계 주식에 대한 세금을 100% 납부 유예하고, 사업 지속 시 사실상 면제로 전환하며, 고용 80% 유지 요건마저 추가 완화를 검토하고 있다. 선진국들은 가족기업을 사적 세습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유산이자 일자리 창출의 핵심 자산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AX 전환과 보안을 함께 설계하는 국가 전략, 가족기업이 피지컬 AI 시대의 생존 모델이라는 진단이 옳다면, 정책의 과제는 명확하다. 신뢰 자본이 사적 특혜로 전락하지 않으면서, AX 전환의 파고 속에서 기술 자산과 일자리를 지켜낼 제도적 설계다. 다섯 가지 보완을 제안한다.
첫째, 가업상속공제를 공제 에서 조건부 유예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현행 제도는 피상속인이 10년 이상 경영한 중소·중견기업에 대해 경영 기간에 따라 최대 600억 원을 공제하고, 승계 후 5년간 업종·자산·고용 유지 의무를 둔다. 2023년 개정으로 사후관리 기간이 7년에서 5년으로 단축되는 등 개선이 있었으나 현장에서는 여전히 받기 어렵고 지키기도 어려운 제도 라는 평가다. 독일처럼 고용 유지 조건 충족 시 85~100% 면제하되 위반 시 추징하는 구조로 바꿔야 한다. 일자리를 지키면 세금을 물지 않고, 깨면 낸다는 명료한 교환이 승계의 유인과 책임을 동시에 만든다.
둘째, 세제 혜택과 지배구조 개선을 법적으로 연동해야 한다. 한국에서 가족기업 논의가 냉소에 갇힌 이유는 제도가 아니라 역사, 즉 편법 승계와 일감 몰아주기의 경험이다. 세제 지원을 받는 승계 기업에는 사외이사 비중 확대, 감사위원회 강화, 내부거래 공시 의무화를 대가로 부과해야 한다. 이는 규제가 아니라 신뢰 자본의 사회적 공인 절차다. 혈연의 신뢰는 기업 내부의 기밀 유지에는 강력하지만, 시장에는 불투명성의 신호로 읽힌다. 혜택의 대가로 투명성을 제도화할 때 내부 신뢰와 외부 신뢰가 양립한다.
셋째, 후계자가 없는 기업을 위한 승계 인프라를 확충해야 한다. 일본은 사업승계·인계지원센터를 통해 중소기업 M&A를 연 5,000건 수준으로 활성화했고 흑자 폐업률이 10%포인트 이상 하락했다. 한국의 기업승계 M&A 매칭은 누적 174건에 불과하다. 다행히 2026년 세제개편안은 가족 승계를 넘어 제3자 승계까지 과세특례를 확대하는 방향을 담았다. 여기에 지역 금융기관의 발굴 기능과 임직원 인수 지원까지 결합해야 한다. 수십 년 축적된 기술이 창업주의 은퇴와 함께 소멸하는 것은 국부의 유출이다.
넷째, AX 지원 사업에 '보안 조건부' 원칙을 도입해야 한다. 현재 정부의 스마트공장 구축, AX-Sprint, M.AX 얼라이언스 등 지원 사업은 전환 속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보안은 부수 항목에 머문다. 그러나 앞서 본 것처럼 AX 전환 자체가 유출 경로를 넓히는 양날의 검이다. AI 팩토리와 스마트공장 지원을 받는 기업에는 산업보안 등급 인증, 공정 데이터의 국내 저장, 외부 솔루션 업체와의 기밀유지 계약 의무화를 지원 조건으로 묶어야 한다. 전환과 방어를 분리된 정책으로 다루는 한, 정부가 지원금으로 깔아준 도로 위로 기술이 새어 나가는 모순이 반복된다.
다섯째, 중소 가족기업 전용의 보안·AI 결합 지원 트랙이 필요하다. '소수 가족 인력 + AI 모델이 뿌리내리려면 디지털 전환 컨설팅과 별도로 산업기밀 보호 인증, 핵심 공정의 접근권한 설계, 내부인 유출 모니터링 체계를 지원하는 전담 트랙이 있어야 한다. 유출 주체의 8할 이상이 내부인이라는 통계가 보여주듯, 보안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과 구조의 설계이기 때문이다.
정책의 방향은 가족기업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기업이 지키는 것을 함께 지키는 것이다. 피지컬 AI가 공장을 장악하는 시대일수록,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적 신뢰와 세대를 관통하는 책임감의 가치는 커진다. 그리고 그 신뢰가 지켜내는 기술 자산의 가치 역시 커진다. AX 전환의 속도와 보안의 깊이를 함께 설계하는 국가만이, 가족기업의 신뢰 자본을 국부의 동력으로 바꿔낼 수 있다.

조선규 | 칼럼니스트
35여 년간 교육과 기업 경영, 그리고 지역 사회 발전의 현장에서 사람과 함께 성장해왔다. “삶의 문제는 결국 사람의 문제”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교육을 통해 변화를 만들고, 기업을 통해 길을 열었으며, 현재는 사회 곳곳의 다양한 문제를 함께 풀어가며 더 따뜻하고 공정한 미래를 그려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