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출판/인문
시 /시조

오늘부터 나는 시인입니다.

시인 홍영수 전문위원
입력
부천시 소사노인복지관 '문예창작반" 탐방

느린 하루 / 이호봉 

 

 

하루가 천천히 흘러간 날에는

세상이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하다.

커피 한 잔의 온도와

창밖을 스치는 바람,

고요 속에서 들리는 나의 호흡까지

모두가 선명해진다.

바삐 스쳐간 지난 시간들이

오히려 한가운데의 삶처럼 느껴지면서

엉키고 설킨 마음이 서서히 풀린다.

느린 하루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충분히 빛나는 시간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나를 다시 만나고,

잊혀진 자그마한 행복들을

하나, 둘 되찾기 때문이다.

------------------------
 

빗소리 교향곡 / 신영기

 

해진 툇마루에 몸을 기대면

마루판 틈새로 고요가 흐르고

눈앞 허공에서

맑은 음표들이 툭 툭 떨어진다.

 

앞마당 귀퉁이의 토란 잎 위로 굴러가는 소리

장독대에 떨어지며 물방울 튀는 풍경들이

첼로와 타악기의 협화음이 된다.

 

바람이 지붕을 훑고 지나가면

처마 끝 낙숫물은 거문고 줄처럼 팽팽하고

텃밭 배춧잎은 흥에 겨운 듯 흔들린다.

 

악보도 없고 지휘자도 보이지 않지만

지그시 눈을 감고

세상의 소음을 씻겨내는

웅장한 빗소리 교향곡을 듣는다.

-------------------

 

소풍 / 홍순임

 

어느 눈부신 아침, 부모님 은혜로

이 땅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것은 풀잎에 맺힌 영롱한 이슬이었고

타는 목을 적시라는 축복의 선물이었습니다.

 

살다 보면 모진 풍파에 옷깃을 적시기도 했고

가시덤불에 생채기도 났었지만

그것마저도 소풍 가는 날처럼

웃으며 받아들이는 기분 좋은 날들이었습니다.

 

지금은 해 질 녘,

그동안 함께 걸어왔던 이들을 떠올려 봅니다.

툭툭 먼지 털고 일어난 자리마다

참 좋은 구경이었고 따스했습니다.

 

나의 소풍은, 그렇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겨지고 있습니다.

 ---------------------

 

경복궁의 해당화 / 박옥희

 

섬마을도 아닌 곳에

진분홍 저고리 떨쳐입고

길손 맞으며

궁궐 입구에 피어났다.

 

잡귀를 물리친다는 해치의 무서움에도

용마루 거느린 웅장한 궁궐의 위엄에도

일월을 거느린 근정전 왕의 엄중함에도

천기의 보호를 받는 교태전 왕비의 정숙함에도

굴하지 않는다

 

바닷가의 바람과 모래를 숨기고

볼우물 환한 뺨에 은은한 분 냄새

총각 선생님 아니면 어쩌랴!

눈길 보내지 않은 이 있을까?

----------------------
 

까치발로서다 / 양월화

 

쭉쭉 뻗은 나무들 사이사이에 끼여

억센 옹이와 거친 나뭇가지가 옥죄어도

굳센 뿌리의 근육과 힘줄을 키웠다.

 

열등과 주눅이라는 멍에를 벗어던지기 위해

그 어디에도 한눈팔지 않았고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순간이 닥쳐와도

한 줄기 빛이 되기 위한

나의 의지는 더욱더 타 올랐다.

 

비록 작고 낮지만

넓고 깊은 어미의 융숭한 마음은

내면에 타오르는 열정의 온음계로 응원했고

열정의 씨앗을 심어 싹트게 했다.

깨물어 아픈 손가락들을 위해.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나무가 되어

해 질 녘 끝자락에 서 있다.

붉게 물든 수평선 허리를 움켜쥐고

노을빛 한 모금 들이마신다.

메마른 혈관을 타고 수액이 흐른다.

 ----------------------------

 

아기 꽃 / 허금식

 

세상에 저마다 고운 빛깔로 피고 져도

내 앞에 피어난 너라는 꽃은

그 어떤 향기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가장 눈부신 꽃이다.

 

가녀린 줄기 끝에 매달려

방긋방긋 웃는 싱그러운 모습은

햇살 머금은 이슬보다 맑고 빛나며

작은 손짓에도 흔들리는 넌

온통 내 마음을 물들이는 봄의 향기다.

 

장미의 향기와 고운 백합보다

오직 너만의 빛깔로 틔우는 꽃망울은

내 가슴에 가장 오래 머무를

단 하나의 꽃 중의 꽃이다.

-----------------
 

방생(放生) / 강영숙

 

손에 쥔, 작은 병 속의 생명 하나

조용한 강가에서 조심스레 기울이며

어둡던 표정의 물고기를 풀어놓으니

환한 미소로 살랑살랑 꼬리 흔들며 헤엄친다.

 

미끈한 지느러미는 물비늘에 반짝이고

더 멀리 더 깊숙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사람의 손에 가면 요리가 되지만

강물에 안기면 하나의 생명이 된다.

누군가의 삶을 제자리로 돌려준다는 것

이토록 가슴 벅찬 일이었던가?

------------------------
 

봄옷, 유행의 딱지를 달다 / 김옥석

 

먼지 낀 창문의 틈새에서

잠든 봄이 옷깃을 여밉니다.

시간이 멈춘 장롱 속 한편에

한때는 세상 전부였던 고운 무늬들

 

이제는 지나간 유행의 딱지를 달고

제자리에서 묵묵히 나를 기다리는데

그 앞에 선 내 마음은 왜 이리 소란스러울까.

 

그 모습 그대로의 옷은

언제든 옷깃 여밀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내 마음은 죽 끓듯 요란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 변덕을 부릴까

 

해진 곳 하나 없는 소매 끝을 매만진다.

부끄러운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변함없는 사물에 기대어

자꾸만 일렁이는 나를 잠시 뉘어본다.

다시 꺼내어 입은 이 봄옷이

흔들리는 내 마음의 옷매무새를

봄날의 꽃잎처럼 예쁘게 다잡아 줍니다.
-------------------------

부천시 소사노인복지관 '문예창작반

 주름진 손끝에서 핀 시의 꽃

                                                                                         

이곳, 부천시 소사노인복지관 '문예창작반" 에서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새겨진 주름 꽃이 조심스럽게 피어났다. 다소 부족하고 서툴지라도 인생의 도화지 위에 굽은 손마디 끝으로 한 잎 두 잎 그려낸 순수시의 꽃에는 칠팔십 평생 간직해 온 향기가 다소곳이 묻어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느라 굵어진 마디마디의 손가락, 지금 그 손가락 사이에 몽당연필을 꼭 쥐었다. 순진무구한 수식어와 매끄럽지 않고 다소 거친 운율이지만, 시어와 시어 사이에는 자식을 위한 기도문이 쓰여 있고, 행과 행 사이에는 가족의 끼니 걱정이 걸쳐 있다. 이러한 시상으로 창작된 한 편의 시 앞에 누구든 함부로 시를 말하지 말자. 어느 대 시인보다 가식 없고, 묵직한 삶의 진실이 시니어의 시 정신의 혈맥을 타고 흐르고 있지 않은가.

 

이제, 육십, 칠십, 팔십 삶의 그늘이 이마를 적실 때, 늦깎이 문학소녀들의 수줍은 외출이 시작되었다. 서툰 시 속에 담긴 생의 무게, 시 문맹의 사슬을 끊고 시의 바다로 노를 젓는 시니어들. 세월의 끝자락에서 시의 돛을 올리고 저 넓은 대양으로 시의 항해를 바란다.

 

(부천시 소사구청 노인복지관 문예창작반강사, 홍영수)

부천시 소사노인복지관 '문예창작반
시인 홍영수 전문위원
share-band
밴드
URL복사
#부천시소사노인복지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