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67] 신필영의 “정월 인수봉”
정월 인수봉
신필영
1.
온 장안이 눈 속에 들어
눈빛들 형형한 날
너는 결연한 생각
꼬나 잡은 붓끝이다
만인소 산 같은 글을 마무리한 수결이다
2.
갓 떠온 생수보다
더 차가운 새벽빛을
소슬한 이마 위에
명주수건 동여매고
동천을 걷어 제친다, 방자유기 징을 치며
3.
가파르게 막히곤 하던
역사, 그 외성의 안쪽
지축을 누가 흔드나
명치끝 얼얼하다
아침은 점고를 끝낸 듯 산을 슬쩍 내려서고

신필영의 「정월 인수봉」은 새해 첫머리의 인수봉을 단순한 자연 풍경으로 바라보지 않고,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신,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향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시인은 겨울 산을 바라보며 한 인간의 결연한 의지에서 나아가 민족 공동체의 각성과 미래를 읽어 낸다.
첫 수에서 인수봉은 단순한 바위산이 아니다. 시인은 "너는 결연한 생각 꼬나 잡은 붓끝이다."라고 하여 인수봉을 거대한 붓끝으로 비유한다. 이는 자연물을 인간의 정신과 연결하는 대담한 상상력이다. 붓은 글을 쓰는 도구이지만, 여기에서는 역사를 기록하고 시대를 바로 세우는 정의의 필묵이 된다. 이어 "만인소 산 같은 글을 마무리한 수결이다."라는 구절에서는 인수봉을 거대한 서명으로 형상화한다. 만인소는 수많은 선비들이 뜻을 모아 올린 상소를 뜻한다. 따라서 인수봉은 수많은 사람들의 의지와 양심이 완성한 마지막 서명이며, 정의를 향한 민족의 결의를 상징하는 존재가 된다. 눈 덮인 서울은 시대를 비추는 거대한 화폭이 되고, 형형한 눈빛은 새로운 시대를 응시하는 민족의 정신을 상징한다.
둘째 수에서는 새벽이 하나의 의식을 치르는 장엄한 순간으로 변모한다. "갓 떠온 생수보다 더 차가운 새벽빛"은 새로운 시작의 순수함과 엄숙함이다. 이어 "명주수건 동여매고"라는 표현은 사람이 결의를 다질 때 머리에 띠를 두르는 모습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새해를 맞는 정신적 각오를 드러내는 상징적 행위이다. 특히 "동천을 걷어 제친다"는 표현에서는 하늘을 마치 커튼처럼 걷어 올리는 활유법이 사용된다. 움직일 수 없는 하늘이 인간의 손길에 의해 열리는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막이 오르는 장면을 역동적으로 보여 준다. 마지막의 "방자유기 징을 치며"는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의식의 북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자연은 더 이상 침묵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역사를 움직이는 생명체가 된다.
셋째 수는 작품의 주제를 가장 깊이 드러낸다. "가파르게 막히곤 하던 역사"라는 구절은 우리 민족이 겪어 온 수많은 시련과 좌절을 역사라는 길의 막힘으로 은유한 표현이다. 또한 "외성의 안쪽"은 단순한 성벽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 두려움과 억압, 시대의 장벽을 의미한다. 이어 "지축을 누가 흔드나"라는 표현은 거대한 시대의 변혁을 암시하며, "명치끝 얼얼하다"는 구절은 그 변화가 개인의 몸속까지 울려 오는 강렬한 감동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한다. 마지막의 "아침은 점고를 끝낸 듯 산을 슬쩍 내려서고"에서는 아침이 사람처럼 점호를 마친 뒤 조용히 자리를 떠나는 모습으로 의인화된다. 자연은 인간처럼 행동하며 하루의 시작을 선언하고, 새로운 시대 역시 그렇게 담담하지만 힘차게 우리 앞에 다가온다.
이 작품에서 인수봉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민족정신과 정의, 결단과 희망의 거대한 기념비다. 붓끝은 역사를 기록하는 책임감을 드러내고, 살아 움직이는 존재다. 결국 「정월 인수봉」은 새해 첫 산행의 감흥을 노래한 작품이 아니라, 역사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정신과 새로운 시대를 향한 굳은 의지를 형상화한 현대시조다.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