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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64] 김양숙의 "무지외반증"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64] 김양숙의 "무지외반증"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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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무지외반증

 

김양숙

 

  그대를 따라가다 그림자를 놓치고서야 오랫동안 디뎠던 어둠이 그대였음을 알았다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며 견뎠던 어둠의 집

어둠은 뜨거운 불과 닮아 디딜 때마다 매번 화상을 입었다

화상을 입으며 안쪽으로 휘어지는 엄지발가락

안으로 휜다는 것은 외로움의 표현방식이었다

 

  그대의 말[]이 초원을 뒹굴며 발작국을 찍었다 말의 발자국도 안으로 휘었다 바람도 초원에 말뚝 대신 제 상처를 새겼다 바람의 상처도 안으로 휘었다

 

  외로움을 견딘다는 것은 기울기가 다른 저울 위에 올라 수평을 유지하는 일과 같아서 출렁거릴 때마다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럴 때마다 더 안쪽으로 휘어지는 엄지발가락 어둠의 시간은 저 혼자 저물어 밤은 낮으로 시간을 바꾸고 낮은 밤으로 배경을 바꾸었다

 

   어둠이 그대를 지우고 나면 내가 남는 것이 아니라 나 또한 지워진다는 바람과 물의 말이 가슴을 관통했다 그대가 마지막으로 남긴 상처가 굳어져 뼈가 될 때까지 휘어지는 엄지발가락을 그냥 두기로 했다

 

—『고래겹의 사생활』(시와산문사, 2023)

 

무지외반증 [ 이미지 :류우강 기자]

 [해설

 

  고통을 길들이며 살아가는 법

 

  서울아산병원에서 만든 의료정보를 보았다무지외반증은 엄지발가락이 둘째발가락 쪽으로 심하게 휘어져서 엄지발가락 관절이 안쪽으로 돌출된 상태를 의미한다증상이 심할 경우엄지발가락이 둘째발가락과 엇갈리는 정도까지 돌아가기도 하는데특히 앞이 좁고 굽이 높은 신발을 자주 신는 여성에게 많이 발생하는 족부 질환이라고 한다.

 

  김양숙 시인은 무지외반증을 본인이 앓았는지 아는 사람이 이 질환으로 고생하는 걸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병에 대해서는 별말을 하지 않는다증세가 어떤지고통의 정도가 어떤지치료 과정이 어땠는지 말하지 않고 무지외반증으로 말미암아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며 견뎠던 어둠의 집에 대해 얘기한다이 증세가 오기 전에는 낮의 세상이었다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에서 시작한 통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을 터, ‘어둠의 집이 되고 만 세상에 대해 묘사를 해나간다그런데 시인의 상상력이 참으로 특이하고 진지하다.

 

  제1연에서 어둠과 외로움을 말한 시인은 제2연에 가서 말과 바람과 상처를 말한다구두도 내게 상처를 주었겠지만 타인의 말들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는가3연은 어둠의 시간은 저 혼자 저물어 밤은 낮으로 시간을 바꾸고 낮은 밤으로 배경을 바꾸었다라는 놀라운 발견물을 보여준다시인은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고 계속 어둠을 운위하고 있다세상이 그만 어두워졌다고 한다보행이 나를 아프게 하니 이 어둠을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제4연은 더욱 놀랍다아픔을 길들이는 과정인데 이번에도 계속해서 어둠에 대한 묘사가 독자의 가슴을 관통한다. ‘그대는 무지외반증일 것이다. “어둠이 그대를 지우고 나면 내가 남는 것이 아니라 나 또한 지워진다는 바람과 물의 말이 가슴을 관통했다는데통증은 바로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통증이 사라지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대가 마지막으로 남긴 상처가 굳어져 뼈가 될 때까지 휘어지는 엄지발가락을 그냥 두기로 했다고 하니 잘하셨다아픔이 삶의 증거이니 아파하면서참으면서아픔을 길들이면서 살아가겠다는 결론에 박수를 보낸다하지만 정말 심해지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서울아산병원의 의료정보는 알려준다.

 

  [김양숙 시인]

 

  1990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하였다. 2009년 한국시인상, 2017년 시와산문 작품상을 수상하였다시집 『지금은 뼈를 세우는 중이다』『기둥서방 길들이기』『흉터를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유』 등을 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시와시학상편운상가톨릭문학상유심작품상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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