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41] 이승은의 “복사꽃 그늘”
복사꽃 그늘
이승은
골짝에 접어들수록 마음처럼 붉어진 길
눈물도 그렁그렁 꽃잎 따라 필 것 같다
고샅길 홀로된 집 한 채
숨어 우는 너도 한 채
복사꽃 그늘에서 삼키느니, 밭은기침
선홍의 내 아가미 반짝이며 떠돌다가
끝내는 참지 못하고
가지마다 뱉어낸 꽃
우리 한때 들끓었던 것
참말로 다 참말이던 것
날카롭게 모가 서는 언약의 유리 조각에
메마른 혀를 다친다, 오래고 먼 맹세의 봄

이 시조는 ‘복사꽃’이라는 화사한 표피 아래, 삼켜야 했던 감정과 끝내 토해낼 수밖에 없었던 진실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첫수에서 “골짝에 접어들수록 마음처럼 붉어진 길”은 공간의 깊어짐과 내면의 농밀해짐을 동시에 암시한다. 골짜기는 단순한 지형이 아니라, 말해지지 못한 감정이 모여드는 심층의 장소다. 이 길을 따라가며 화자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정서의 지점으로 스며든다.
이어지는 “눈물도 그렁그렁 꽃잎 따라 필 것 같다”는 감정의 범람을 자연의 질서로 치환한다. 눈물은 흘러내리는 대신 ‘핀다’. 슬픔조차 생장과 개화의 형식으로 감내되는 세계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곧 “고샅길 홀로된 집 한 채 / 숨어 우는 너도 한 채”라는 고독의 이미지로 수렴된다. 여기서 ‘집’은 사람을 대신하며, 비어 있음과 숨어 있음이 겹쳐진다. 관계는 끝났으나 감정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서로 다른 고샅길에서 각자의 울음을 삼키고 있다.
둘째 수에서 복사꽃 그늘은 더 이상 낭만의 장소가 아니다. “삼키느니, 밭은기침”이라는 표현은 감정을 꾹 눌러 참는 몸의 반응을 생생히 드러낸다. ‘밭은기침’은 울음의 변주이며, 말해지지 못한 고백이다. “선홍의 내 아가미”는 생존을 위해 숨 쉬는 기관이면서도, 붉게 상처 난 내면을 연상시킨다. 화자는 이 아가미로 감정을 걸러내며 떠돌다가, 결국 “가지마다 뱉어낸 꽃”으로 폭발한다. 꽃은 아름다움이지만, 여기서는 참지 못해 쏟아낸 말, 혹은 감정의 파열이다. 침묵 끝의 발화는 늘 이렇게 상처를 동반한다.
마지막 수는 회상의 층위에서 시의 의미를 더욱 날카롭게 벼린다. “우리 한때 들끓었던 것 / 참말로 다 참말이던 것”이라는 고백은, 과거의 열정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려는 자기 설득처럼 읽힌다. 그러나 곧바로 등장하는 “언약의 유리 조각”은 그 진실이 얼마나 쉽게 파편화되는지를 보여준다. 언약은 맹세였으나, 유리는 깨질 수밖에 없는 물성이다. 그 파편에 “메마른 혀를 다친다”는 결말은, 오래고 먼 약속을 다시 말하려다 스스로를 다치게 되는 현재의 화자를 보여준다. ‘맹세의 봄’은 이미 지나갔고, 남은 것은 상처와 건조한 언어뿐이다.
이 시조는 끝내 사랑이나 이별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이 얼마나 쉽게 고통의 다른 이름이 될 수 있는지를, 절제된 언어로 깊게 증명하고 있다.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