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71] 박명숙의 “바늘의 필적”
바늘의 필적
박명숙
내 말을 밟지 말아요 부러뜨리지 말아요
침묵에도 바늘이 필요한 시간이니
내 입은 내가 꿰맬게요 슬픔도 맡겨주세요
뜯어진 슬픔들을 궁지로 몰지 않을게요
마음도 뚫리지 않도록 솔기를 이어가며
말 없는 말의 필적을 땀땀이 돌려드릴게요

「바늘의 필적」은 단순한 재봉 도구가 아니라 상처 난 마음을 꿰매고 끊어진 관계를 이어 주는 치유와 회복이다. 또한 바늘이 지나간 자리를 ‘필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말로 기록할 수 없는 마음의 흔적을 바늘이 대신 써 내려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첫 수의 초장 “내 말을 밟지 말아요 부러뜨리지 말아요”에서 ‘말’을 밟고 부러뜨릴 수 있는 대상으로 표현한 것은 다양한 의미를 함께 보여 준다. ‘말’은 언어이면서 동시에 화자의 마음과 존재다. 따라서 말을 함부로 짓밟거나 꺾는 행위는 단순히 언어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과 존엄을 훼손하는 행위가 된다. 이어지는 “침묵에도 바늘이 필요한 시간이니”에서는 침묵을 단순히 말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상처를 꿰매고 내면을 정돈하는 적극적인 시간으로 전환한다. 침묵 속에서도 바늘은 움직이며, 말 대신 상처를 봉합하는 새로운 언어가 된다.
“내 입은 내가 꿰맬게요”라는 표현은 특히 인상적이다. 입을 꿰맨다는 것은 말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자기 절제와 자기 치유의 의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침묵이나 체념이 아니다. “슬픔도 맡겨주세요”라는 말에서 화자는 자신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 감당하고 꿰매겠다는 주체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여기서 ‘꿰매다’는 상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상처 난 자리를 다시 이어 붙이는 행위이므로, 작품은 인간의 삶에서 상처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보다 상처를 품은 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중요하다는 철학적 인식을 보여 준다.
둘째 수 초장 “뜯어진 슬픔들을 궁지로 몰지 않을게요”에서는 슬픔을 하나의 생명체처럼 대한다. 슬픔을 억압하거나 몰아세우지 않고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는 고통을 대하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 준다. 이어 “마음도 뚫리지 않도록 솔기를 이어가며”에서는 바늘이 천을 꿰매듯 마음의 균열을 봉합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솔기’는 본래 천과 천을 이어 주는 경계이지만, 여기서는 상처와 상처 사이를 연결하여 다시 온전한 마음을 만드는 경계로 확장된다.
마지막 종장의 “말 없는 말의 필적”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역설이다. 말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마음의 표현, 즉 침묵 속에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전달되는 진실을 뜻한다. “땀땀이 돌려드릴게요”에서 바늘과 실의 반복적인 움직임은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 상처를 회복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결국 이 작품에서 바늘은 상처를 찌르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상처를 치유하는 도구이다. 찌름과 봉합이라는 상반된 기능을 하나의 바늘에 겹쳐 놓음으로써, 고통과 치유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삶의 회복 과정 안에서 함께 존재한다는 의미를 만들어 낸다.
따라서 「바늘의 필적」은 침묵을 무력함으로 보지 않고,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꿰매어 다시 온전해지는 시간으로 바라본다. 바늘이 남긴 작은 흔적들이 결국 하나의 필적이 되듯, 인간의 삶에서도 말하지 못한 슬픔과 상처의 흔적들이 모여 한 사람의 문장이 된다. 이 작품은 결국 상처를 없애는 것이 치유가 아니라, 상처 난 마음의 솔기를 한 땀 한 땀 이어 다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회복임을 조용하고도 깊이 있게 말하고 있다.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