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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탐구] 최연숙 시인 집중조명 - 반성적 성찰과 삶의 근경화_ 홍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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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탐구] 최연숙 시인 집중조명 - 반성적 성찰과 삶의 근경화_ 홍영수

시인 홍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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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의 세상보기] 

시인들은 물질의 풍요와 영화를 뒤로한 채 늘 어둡고 그늘진 곳에서 궁핍과 결핍의 세월을 고스란히 감내하며 인내와 고통의 과정을 걷고 있다. 그것은 먹구름 사이로 환하게 비추는 한 줄기 빛을 체험하기 위함일 것이고, 또한 거칠고 황량한 적막 속에서도 언어의 신전을 지어 수많은 존재자를 세계의 가운데 데려와 현존하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최연숙 시인의 시편에는 시인의 상상력과 몸소 겪고 체험했던 객관적 진실들을 포착하여 시적 상상력으로 작품을 형상화했다. 그것은 곧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의 근원적인 존재를 찾아 헤맸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적 진실을 창조하여 독자에게 감동을 전달하면서 시인은 시만 쓰는 사람이 아니라 가슴에는 생명의 기운이 넘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름 옷가지를 빨아 가을볕에 넌다

너는 이렇게 살아라

오래전 누가 정해놓은 것처럼 나는

무슨 일이든 차근차근해야 했다.

앞서간 자의 길은 어둡거나 적막했으므로

가을볕에서는 하얗게 빨래를 하자

시를 의심하고

시로써 회자되는 일이 어디 숨고 싶은 일

이겠냐마는

자작나무 숲에 가면 나는 자꾸 변명을 한다

어둠의 유형이 촘촘해져 오고

정육면체의 한 면을 풀어놓은 듯 도돌이표를

몸에 새겨 넣는다

왜라는 질문을 버리고 허상에 꽂힌다.

가장 곤하게 내려앉은 독백

달빛 한 점 베어 문 것처럼 이가 시려왔다.

 

- 「나의 본업은 무직입니다」 전문

 

시를 의심하고/시로써 회자되는 일이 어디 숨고 싶을 일/이겠냐마는에서 화자는 시인에 대한 주변인과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겠냐마는의 의도적 행갈이로 결코, 숨기고 싶지 않은 것임을 강조하면서 괜스레 자작나무 숲에서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있다. 시제의 「나의 본업은 무직입니다」에서 풍기는 뉘앙스에서 시인은 예술적 승리와 세속적 행복은 결코 병존할 수 없음을 얘기하는 듯하다. 이런 측면에서 시인들은 경제적 풍요로움을 추구하기보다 예술적 가치에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정작 시인이 창조해야 할 것은 마술의 성과 같은 허상이 아니다. 그러함에도 화자는 역설적으로 왜라는 질문을 버리고 허상에 꽂힌다했다. 허상에 꽂힌다했을까? 그 이유는라는 질문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한 질문 없는 단순한 이미저리만으로 시를 창조하려고 할 때는 곡두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통증의 달빛을 베어 무니 이가 시려 울 수밖에. 시인은 끝없는 질문과 의문을 가지고 허상이 아닌 실상에서 눈에 보이는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낯설게 봐야 한다. 깊은 뜻은 형상 너머에 있다(경생상외境生象外) 시인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겹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인식해서 시적 언술로 표현한다.

 

컵라면 용기에 물을 붓는다

msg처럼 사람을 홀리지는 말아야지

면을 삼키는 동안 두통 같은 언어가 쏟아진다

그래, 속이 꽉 찼으니, 이제는 눈물이 나올 거야

가볍게 제목을 정하고

잘난척하는 문장을 건져 올린다

슬픔에게 슬쩍 기대 가려는 의도를 들켜버렸다.

마음을 탓하기보다 몸의 일부가 된

종유석 정도면 좋겠다

실컷 놀고 나서는 운 적 없다고 잡아뗀다.

종종 네 것과 내 것 사이에서 달이 뜬다.

길가에 핀 채송화, 붓꽃, 맨드라미가

내 얼굴이구나

 

- 놀아나다」 전문

 

시는 겉치레의 화려한 의상이나 값비싼 장신구와 비누 거품 같은 언어, 놀랄만한 수사법 등이 결코 시의 형식을 좌우할 수는 없다. 그래서 화자는 2행의 “msg처럼 사람을 홀리지는 말아야지한다. 현란한 기교를 버리고 시 창작을 하려니 두통 같은 언어눈물이 나올 수밖에. 화자는 시의 형식을 통제하는 것은, 오직 시 정신뿐이라는 것을 이미 터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마음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탓하기보다 몸의 일부가 된/종유석 정도면 좋겠다한다. 기나긴 세월의 결정체인 종유석을 바라는 것은 몸소 겪어야 하는 체험적 요소에서 쓴 시가 감동을 준다는 것을 의미하고 종종 네 것과 내 것 사이에서 달이 뜬다로 비유하고 있는데 너와 나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 마르틴 부버가 나는 너로 인해 나가 된다를 생각게 한다. 이러할진 데 어찌 놀아야 할 시간이 있겠는가. 그리고 화자는 꽃잎 속에 안긴 토양과 수분, 햇빛 등을 알기 위해 채송화, 붓꽃, 맨드라미의 꽃잎으로 들어가 꽃이 되었다. 언어의 샴푸를 즐겨 쓰는 시인은 언어의 거품이 사그라들면 그 무엇이 남을까? 되새겨 볼 시이다. 시인의 시관(詩觀)을 읽을 수 있다.

 

산을 하나 넘으면

또 산 하나가 있다

저 산을 넘어가면

평탄할 거라 믿었는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신다면

백목련 가지에 움트는

종소리를 보셨는가

 

눈앞에 작은 산 하나를 모른다 하고.

 

-「작은 산 하나」 전문
 

산을 하나 넘으면 /또 산 하나가 있다 _ 최현숙      [이미지: 류우강 기자]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어떤 고난이나, 역경을 겪고 나면 또 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화자는 평탄할 거라 믿었는가라고 묻고 있다. 그리고 느닷없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신다면/백목련 가지에 움트는 /종소리를 보셨는가하며 의문형으로 선사가 화두를 툭 던지듯이 시상을 전개한다. 화자가 하고픈 얘기는 눈앞에 작은 산 하나도 모른다 하고서 이제 갓 움트는 꽃망울에서 한 울림의 종소리 같은 사랑을 알 수 있겠는가?’ 이 말인즉슨 당신에 대한 감춰진 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것이다. 백목련 꽃처럼 하얀 사랑을. 이처럼 화자는 산을 넘은 것은 산 그늘”(「산그늘」), “저 산을 넘어가면”(「작은 산 하나」)에서 의 활유적 비유를 통해 내적 정서를 반영하고 있으며, 산을 통해 화자 자신을 객관화하고 있다.
 

「산그늘」에서매일 매일이 지던 삶이라던 친구는/한참을 울고 갔다와 에서의 지던 삶과”“그래그래 이제 뚝/산을 넘은 것은 산그늘이었다에서 사실 어스름 저녁이면 산그리메는 산을 넘는 것이 아니라, 산비탈을 따라 내려온다. 그러나 화자는 친구의 지던 삶넘은 것이라는 역설을 통해 친구를 일으켜 세우면서 이불 홑청같은 펄럭임의 희망을 안겨준다. 시인의 시심에서 우러나는 깊은 배려심을 읽을 수 있다.

 

몇 편의 시에서 볼 수 있는이별상실등의 언표들은 시인의 삶의 중심 영역에서 겪었던 의식들의 산물이 아닌가 싶다.

 

짧은 시간 짧은 이별

인사도 없이 떠나가는 사람에게 건네는

혼잣말이 목울대를 건드린다

뒤돌아보지 말고

가는 길에 꽃이 피었다 하지 말고

진심을 보여주듯이

안녕이라고 쉽게 인사를 한다

 

- 「인사하는 법」 부분

 

위 시에서 보듯 짧은 시간 짧은 이별/인사도 없이 떠나가는 사람에게 건네는/혼잣말이 목울대를 건드린다이처럼 짧은 이별의 순간에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나는 이에게 건네는 혼잣말이 목울대를 건드린다고 한다. 이렇듯 인사도 없이”, “안녕등의 시어를 볼 때 화자는 긴 한숨을 지으면 뒤돌아보지 말고떠나는 이에게 이별하지만, ‘쉽게하는 인사와 혼잣말의목울대를 건드리는 것에서 역설적인 수사법으로 헤어짐의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목소리 1」의 나는 잠시 나를 추모했다”, “왠지 모를 벅참은 어느 때고 쓸쓸해지려는 징조였다/낯선 방 낯선 공기 낯선 방식의 결여”, 그리고 「목소리 2」의 마지막 행, “슬픔이 원형으로 복원되는 가장 긴 시간대등은 시적 화자의 상실이나 이별의 상징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슬프다. 슬픔의 원형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리고 「외출」에서는가벼운 몸마른 잎사귀등이 상징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빈 나무 의자 곁을 지켜내느라/새벽이 오는 줄도 몰랐다한다. “빈 의자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닌, 그 곁을 지킨다는 것은, 무언가, 누군가의 자리가 비운, 그래서 상실의 아픔으로 새벽이 오는 줄도 몰랐다.” 한다. “상실의 문은 상실을 몰랐을 때 열리고 아는 때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표현된 언표들을 보면 시인 자신의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상황을 시적 사유를 통해 시의 언술로 재 문맥화 한 것으로 보인다. 깊은 슬픔의 구조로 읽힌다.

 

제주 중산간 마을 초입에

하얗게 눈 덮인 밭담을 끼고 엎드린

지붕 낮은 집 방 두 칸을 세내어 살면

 

봄이면 고사리 꺾어 널어놓고

가을이면 억새풀 서걱이는 오름에 올라

숨 고르기 끝에 가만 눈을 감으면

 

바람이 어느새 내 마음속을 헤집고 들어와

채근하지 않던 몸의 빗장을 푼다

파도 소리 없는 날엔 밤이슬이 대신 울어줄 거야

 

이 악물고 버티던 한 시절이 있어

내가 사는 건가 싶다가도

수확이 끝난 감귤나무 가지 끝에

 

구름에 걸친 듯 바다가 있어

바다가 거기 있어

나는 또 강물로 흐를 것인가.

 

- 「바다가 있어」 전문

 

밭담, 고사리, 억새풀, 바람, 파도 소리, 밤이슬, 감귤나무, 구름, 바다, 강물 등, 자연의 상징물을 통해 수평적인 감성의 이미지를 화자와 동일시하면서 제주살이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첫째 연의 지붕 낮은 집 방 두 칸을 세내어 살면에서 면앙정 송순의 시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 삼간 지여 내니/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맛져 두고/강산을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십 년을 경영하여」)와 특히 2연의 봄이면 고사리 꺾어 널어놓고/가을이면 억새풀 서걱이는 오름에 올라는 고산 윤선도의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게 먹은 후에/바위 끝 물가에 실컷 노니노라”(「만흥漫興」)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시적 화자 또한, 자연 산수에 은거하며 안빈낙도의 삶을 갈망하고 있다. 3, “이 악물고 버티던 한 시절이 있어/사는 건가 싶다가도에서 보듯 그동안 주어진 삶에 이를 악물고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자연에 동화되어 순응하고 자족하고 싶은 화자의 마음이 엿보이는 시이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행 나는 또 강물로 흐를 것이다로 아퀴지은 것은 도가에서 얘기하는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것 흰나비 떼 같네

세상이 잠시 멈춘 듯

흰 눈이 쌓여

어둠을 저만치 밀어내고

점점이 왔다가 사라지는 것들

하늘 아래

아무 소리 들리지 않고

귀 기울이는 이 하나 없어도

자꾸만 자꾸만

내 가슴팍을 파고드는

설움같이

 

- 「봄눈」 부분

 

봄눈 [ 이미지:류우강 기자]

이 시에서흰나비 떼봄눈의 상징이다. 화자는 여성적인 감수성으로 겨울이 아닌, 꽃 피는 봄날에 흰나비 떼가 날아다니듯 나풀나풀 내리는 눈을 통해 소녀적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아무 소리 들리지 않고/귀 기울이는 이 하나 없어도가슴에 파고드는 설움같이흰 눈처럼, 시적 화자는 봄눈을 통해 고운 심성의 내적 심상을 토로하고 있다.
 

일상적인 시를 쓸 때는 긴장과 이완 없이 진부한 사설로 빠지기 쉽다. 그렇다고 느슨하고 평이 한 시가 시적이지 않고 절조의 약화로 이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특별한 수사와 비유 없이 지극히 평범하고 무료한 시적 진술이 독자들에게 은은한 감흥을 일으키고 감동을 준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최연숙 시인은 한 방울의 수혈로 시어를 살려 피돌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잔잔한 시적 매력에 빠지게 한다. 그것은 유연한 직관과 시적 구심력으로 보이는 세계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한의 심연에 대한 환기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 창작에서의 주된 기법보다 새로움의 인식을 주는 시인의 앞날을 기대해 본다.

 

시인 홍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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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시인#홍영수평론#최연숙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