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산의 책다락 9 ] 뉴턴의 《프린키피아》

■책 소개
《프린키피아》에 쏟아진 동서고금 과학자들의 찬사
“과학의 역사에서 단 한 권의 책을 고르라면 이 책일 수밖에 없다. 근대 과학을 열어 세상을 바꾼 책이기 때문이다. 인류 최고의 천재가 쓴 최고의 책을 소장하는 기쁨을 누려보시라.”
- 김상욱(물리학자, 경희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뉴턴은 《프린키피아》를 통해 우주가 인식 가능하다는 점을, 더 중요하게는 우주가 예측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줬다. 우리는 이 위대한 과학 천재에게 현대 문명을 빚졌다.”
- 닐 디그래스 타이슨(천체 물리학자, 세계적 과학 커뮤니케이터)
“어느 누가 그보다 더 가까이 신에게 다가갔으랴.”
- 에드먼드 핼리(핼리 혜성의 공전 주기를 예측한 천문학자)

■서 평
“과학의 역사에서 단 한 권의 책을 고르라면 이 책일 수밖에 없다.”
과학 애독자의 성서, 뉴턴의 《프린키피아》 한국어판 출간!
위대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과학 혁명과 그로부터 이어진 근대 과학의 발전에 압도적인 공헌을 한 책이다. 고전역학의 바탕을 만들고 과학적 탐구 방법을 제시하며 현대 문명의 주춧돌을 세운 《프린키피아》는 말 그대로 인류의 역사를 바꾼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총 3권으로 이루어진 원서를 1권으로 묶고 현대적 디자인으로 제작한 완역본으로, 과학 독자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이론물리학자 박병철의 정확하고 유려한 번역을 통해 《프린키피아》를 소개한다.
1. 현대 문명을 만들어낸 과학의 고전을 만나다
- 근대 과학의 표준을 제시한 뉴턴의 위대한 아이디어
뉴턴이 활동한 17세기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science)’이라는 방법론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자리를 대신하던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은 추측과 가정만으로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이런 풍조 속에서 뉴턴은 엄밀한 수학적 방법론을 이용하여 자연계의 운동을 수식으로 완벽히 기술했다. 《프린키피아》는 바로 그 뉴턴역학을 집대성한 저작이다. 《프린키피아》에 실현된 뉴턴의 수학적 방법론은 근대 이후의 과학을 상징하는 하나의 ‘표준’으로서 현대 과학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프린키피아》 제1권은 관성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운동, 제2권은 저항이 있는 공간 또는 매질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을 기술하며, 제3권은 행성과 위성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해석한다. 운동법칙과 중력법칙 등 고전역학의 토대가 되는 법칙을 비롯해 케플러의 행성 운동법칙에 대한 수학적 증명, 천문 관찰을 통한 중력의 역제곱 법칙 증명 등이 모두 《프린키피아》에서 소개된다. 널리 알려졌듯 이 같은 뉴턴역학은 고전물리학의 근간을 이루며 과학 발전에 이바지했다. 또한 중력법칙은 250년 후에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낳은 모태가 되었고 양자역학이 등장한 후에도 여전히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뉴턴의 이론은 지나간 과학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논리적 역학이란 임의의 힘에서 초래된 운동과 임의의 운동을 야기한 힘을 정확한 명제와 증명으로 표현하는 과학이라 할 수 있다. 고대인들은 이런 역학을 “다섯 가지의 역학적 힘”으로 분류하여 연구했으나, 중력은 인공적인 힘이 아니었기에 다섯 가지 힘으로 무거운 물체를 움직일 때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인공물이나 인공적 힘이 아니라 자연철학과 자연의 힘이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중력과 부력, 탄성력, 유체의 저항력과 같은 인력과 척력을 주로 다룰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자연철학의 본분은 자연 현상(운동)으로부터 힘을 발견하고, 그 힘으로부터 다른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권과 2권에서는 일반적인 명제(proposition)를 증명하고, 3권에서는 이 명제를 이용하여 세상의 체계(the system of the world)를 설명하는 식으로 풀어갈 것이다. (중략) 독자들은 부디 이 책을 열린 마음으로, 끈기 있게 읽어주기 바란다. 도중에 오류가 발견되더라도 너무 심하게 꾸짖지 말고, 올바른 답을 찾아서 알려주기 바란다.
- 〈초판 저자 서문〉 중에서(9~11쪽)
실험과 관측에 기초한 자연철학이야말로 자연을 이해하는 최상의 수단이다. 그리고 우리의 탁월한 저자 뉴턴이 바로 이 자연철학의 정수를 세 권의 책에 담아 지혜의 빛을 밝혔다. 그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 최고의 천재이자, 이 분야의 전문가들도 찬양해 마지않는 최고의 자연철학자이다. 이제 우리는 뉴턴이 활짝 열어놓은 문을 자유롭게 통과하여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의 세계를 마음껏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 〈2판 편집자 서문〉 중에서(34~35쪽)
제1법칙: 모든 물체는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정지 상태나 등속 직선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제2법칙: 운동 상태가 변하는 정도는 물체에 가해진 힘에 비례하며, 변하는 방향은 힘이 가해진 방향과 같다.
제3법칙: 모든 작용(action, 힘)에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반작용(reaction)이 수반된다. 다시 말해서, 두 물체 사이에 교환되는 힘은 항상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이다.
- 〈공리: 운동의 법칙〉 중에서(67~78쪽)
2. 믿고 보는 번역자 박병철의 버킷 리스트, 《프린키피아》 한국어판
- 30년의 준비 기간, 3년의 번역 기간을 거쳐 이룬 한국 과학 출판의 성취
이론물리학자 박병철 박사는 과학 독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번역자로 유명하다. 《엔드 오브 타임》, 《엘러건트 유니버스》,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신의 입자》 등 1990년대 말부터 출판계를 뒤흔든 수많은 과학책이 그의 손을 거쳐 출판되었다.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 정확하고 유려한 문장력, 번역서 100여 권을 꾸준히 출간한 성실함 등으로 인해 그는 독자들의 깊은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다. 서점가에서 ‘박병철 옮김’은 유익한 과학책,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로 번역된 과학책을 상징하는 하나의 브랜드로 통용될 정도이다.
학창 시절 《프린키피아》를 접한 박병철 박사는 이 책의 번역이 자신의 ‘버킷 리스트’였다고 고백한다. 이후 30여 년이 흘러 경험 많고 능숙한 과학 전문 번역자가 되었지만, 그런 그에게도 여전히 《프린키피아》 번역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17세기 수학 표기법은 지금과 많이 달랐고,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적절한 한글 용어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뉴턴의 증명에 생략된 내용이 많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복잡한 논리와 과감하게 생략된 증명을 파고들어 뉴턴의 자취를 쫓아야 했다. 어렵고 중대한 작업을 결국 마무리해낸 그는 과학 독자들이 《프린키피아》 독서를 통해 자신과 같은 성취감을 느끼길 간절히 바란다고 말한다. 적재적소에서 독서를 이끄는 옮긴이주와 함께 주요 명제와 정리를 차분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과 그 속에 담긴 뉴턴의 생각을 조망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아이작 뉴턴 경
(Sir Isaac Newton,1643~1727)
1643년,
영국 동부 울스소프에서 태어난다. 어머니 해나 에이스커는 울즈소프 장원을 소유하고 있는 뉴턴의 아버지, 아이작 뉴턴과 1642년 결혼하지만, 그해 10월 아버지 아이작 뉴턴이 죽고, 1646년, 어머니 해나는 어린 아들을 집에 남겨두고 노스위덤의 목사였던바나바스 스미스와 재혼한다. 그 후, 1653년에 바나바스 스미스가 죽자, 해나는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세 자녀, 메리,벤자민,한나와 함께 뉴턴이 있는 울즈소프로 복귀한다.
1655년, 그랜섬 킹스스쿨 (문법학교) 에 입학하여, 마을의 약제사 클라크 씨의 집에서 하숙한다. 뉴턴은 이때 처음으로 화학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되고, 문법학교에서는 처음에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으로 여겨졌으나, 결국 반에서 수석이 된다.
~1658년
학교를 떠나 가문의 농장을 관리하는 일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일부러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는 이 농장일에서 완전히 무능하고 부주의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랜섬 학교 교장 헨리 스토크스와 어머니 해나의 오빠 윌리엄이 그를 다시 그랜섬 학교로 보내 대학 진학을 준비하게 하자고 그녀를 설득한다.
1661년
6월 5일/15일(율리우스력/그레고리력)에 트리니티 칼리지, 케임브리지에 입학한다. 처음에는 서브-사이저 [13] 그리고 이어서 사이저 [14] 로 등록하여 학업을 이어간다. 추가로 소규모 금전 대부를 통해 생활비를 마련하기도 한다.
1662년
그 해 오순절(Whitsun) 전후로, 어떤 형태로든 종교적 위기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오순절 전후에 저지른 죄목 들을 목록으로 작성한다.
1663년
20년동안 함께 케임브리지에서 생활하게 될 조수이자, 룸메이트, 존 위킨스를 만난다.
1664년
아마도 당시 새로 제정된 루카스 수학 석좌 교수직을 맡고 있던 아이작 배로우 (Isaac Barrow) 의 수학 강의를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뉴턴은 여기서 고전, 유클리드 기하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중심의 공식적인 대학 교과과정을 거의 무시한 채, 수학과 광학에 대한 사적인 학습에 몰두한다. 그리고 대학 노트에는 대신 ‘Quæstiones quædam Philosophiæ’(어떤 철학적 질문들)이라는 제목 아래 폭넓은 과학적 주제에 대한 기록을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1665년~1667년
학사 학위 취득, 1665년 여름, 뉴턴은 울즈소프로 돌아간다. 케임브리지에서 전염병이 발생하면서 울즈소프에 머무르게 되었고, 1666년 봄에 잠시 케임브리지에 들렀다가 다시 전염병이 재발하자 곧 돌아와 1667년 3월까지 그곳에 체류한다. 이 기간 동안 뉴턴은 거의 독학으로 수학과 광학을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미적분학이라 불리는 이론의 기초를 확립한다(당시 뉴턴은 이를 ‘급수와 유율의 방법(method of series and fluxions)’이라 불렀으며, 1666년 10월의 논문에서 미분과 적분의 기본 규칙을 명시한다).
또한, 빛이 단일하지 않고 이질적인 구성임을, 굴절에 의한 분해 실험을 통해 증명한다. 자신의 눈에 직접 실험을 가하며 거의 실명할 뻔하기도 했다.
수십 년 뒤 뉴턴 본인이 그렇게 회상했다는 바에 따르면, 사과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중력에 대한 생각에 집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달이 지구 궤도를 도는 데 필요한 힘(케플러의 제3법칙에 의거) 이 지상의 중력과 동일한 종류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만유인력의 이론 전체가 완전히 정립되는 데에는 이후로도 20년이 더 걸리게 된다.
1667년~1668년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우로 선출됨 (9월 22일 / 10월 2일). 이는 다음의 조건들을 수반한다:
성공회(Church of England)의 신조인 39개 조항(Thirty-Nine Articles) 에 서명할 것 (특히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정통 신앙 고백에 대한 조항),
독신 서약을 할 것, 그리고 석사 학위를 받은 후 7년 이내에 성직 서품을 받을 것을 약속해야 했다. 이어서 1668년에는 석사 학위를 받는다
1669년
『무한한 항을 가진 방정식에 의한 해석에 관하여』(De analysi per æquationes numero terminorum infinitas)를 집필함. 이는 미적분학 정립의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 아이작 배로우는 루카스 수학 석좌교수직에서 물러나 찰스 2세의 궁정 목사가 되기로 하며, 후임으로 뉴턴을 추천하고, 뉴턴은 10월 19일/29일에 해당 직을 계승한다. 배로우와 수학자이자 출판인인 존 콜린스는 뉴턴에게 미적분에 관한 연구를 출판할 것을 권하지만, 뉴턴은 이를 망설인다. 배로우의 요청으로, 뉴턴은 그가 생전에 진행한 『광학 강의』(Lectiones opticæ)를 편집해 출간 준비를 도왔으나, 사실 뉴턴 자신은 이미 그보다 훨씬 앞선 미출간 광학 연구를 해두었고, 그것은 배로우의 많은 결론들과 상충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이 시기부터 뉴턴은 라자루스 제츠너의 화학 극장을 정독하며 연금술에 깊이 빠지게 된다.
1670년
(1월) 루카스 수학 석좌교수로서 강의를 시작함. 후대의 일화들에 따르면, 그의 강의는 청중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매우 저조한 참석률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뉴턴은 여기서 순수 수학이 아닌 기하광학에 대해 강의하며, 색채의 과학, 더 나아가 자연철학 전체가 수학적 원리에 의해 지배된다는 급진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1671년
배로우는 뉴턴을 설득하여 그가 만든 망원경을 왕립학회에 시연하게 하고, 이는 큰 반향을 일으킨다. 뉴턴은 『급수와 유율의 방법에 대하여』(De methodis serierum et fluxionum)를 집필하며 미적분학의 원리를 정리하지만, 이 저작은 1736년까지 출판되지 않는다.
1672년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됨 (1월 1일/11일).
뉴턴의 빛과 색에 대한 이론 (Theory about Light and Colors)이 왕립학회의 학술지 Philosophical Transactions에 발표된다. (1월 30일/2월 9일). 다양한 방면에서 비판이 제기되며, 특히 학회의 실험 책임자 로버트 훅(Robert Hooke)의 반응은 뉴턴의 격렬한 반발을 일으키고, 이후 4년에 걸친 수많은 논쟁에 그를 휘말리게 만든다. 이 시기 동안 뉴턴은 여러 차례 과학적 저작이나 서신 교류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럼에도 그는 훅이 1703년에 사망할 때까지 간헐적으로 독설 섞인 반공개적 논쟁을 이어간다.
1673년
과학계에 복귀하라는 여러 차례의 설득을 무시하고, 비밀리에 연금술(또는 화학) 연구에 더욱 몰두한다. 이 무렵부터 그는 성서의 본문 전승사(原典 및 다양한 번역본)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며, 이는 평생 동안 그를 사로잡는 주제가 된다. 곧이어 그는 삼위일체 교리가 서기 4세기에 도입된 이단적 오류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1675년
트리니티 칼리지의 석사로서 재학 7년째에 접어든 뉴턴은 성직 서품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을 면제받기 위해, 봄에 런던으로 가 국무장관 조지프 윌리엄슨을 찾아가 면제를 요청한다. 요청은 받아들여지고, 뉴턴을 위해 학칙 자체가 수정된다. 그가 어떤 근거로 면제를 요청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의 개인적인 이유는 거의 확실히 삼위일체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왕립학회에 빛과 색의 원인에 관한 ‘가설’을 보낸다. 이 글은 대략 같은 시기에 뉴턴이 집필했으나 외부에 공개하지는 않았던 연금술 논문 「자연의 명백한 법칙과 식물 생장에 있어서의 과정에 관하여」 (Of natures obvious laws and processes in vegetation)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후 훅과의 관계는 악화되는데, 이는 훅이 뉴턴이 그 ‘가설’에서 자신이 『마이크로그라피아』(1665)에서 먼저 제시한 여러 아이디어를 마치 자신이 처음 고안한 것처럼 주장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676년
라이프니츠는 10월에 런던을 방문하고, (뉴턴이 모르는 사이에) 존 콜린스로부터 뉴턴의 『해석에 관하여(De Analysi)』 사본을 보여받는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이미 독자적으로 미적분학의 기본 원리를 확립한 상태였으며, (훗날 그가 인정하듯이) 급수 전개에 관한 뉴턴의 작업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1679년
어머니의 병환을 돌보기 위해 봄에 울즈소프로 돌아가며, 어머니는 6월 4일(14일 그레고리력 기준)에 묻힌다. 뉴턴은 가족의 일을 정리하기 위해 그해 대부분을 울즈소프에서 보낸다.
1679년~1680년
로버트 훅과의 편지 교류를 통해 낙하하는 물체의 경로에 대해 논의하면서, 뉴턴은 관성(inertia)과 구심력(centripetal attraction)이라는 핵심적인 역학 개념을 정립하게 된다.
1680년~1681년
11월과 12월에 출현한 혜성에 대해 존 플램스티드와 서신을 주고받는다. 플램스티드는 이 두 혜성이 동일한 천체라고 주장했고, 뉴턴은 처음에는 반박했으나 이후 플램스티드의 견해가 옳았음을 인정한다. 이 일은 뉴턴의 중력 이해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1683년
위킨스는 펠로우직을 사임하고 케임브리지를 떠난다(아마 결혼을 하기 위해서인데, 펠로우로서는 결혼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뉴턴은 험프리 뉴턴(동명이인이며 혈연 관계는 없다)을 자신의 방에 함께 거주하게 하며 조수로 고용한다.
1684년
8월: 핼리가 뉴턴을 방문하여 천문학적 주제, 특히 중력 개념에 대해 논의한다. 핼리는 이후 뉴턴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중 한 사람이 된다. 이 시기 뉴턴은 목성과 토성 사이의 인력 가능성에 대해 플램스티드와 서신을 주고받는다. 같은 때에, 라이프니츠는, 라이프치히에서 발간되는 학술지 《Acta Eruditorum》에 자신의 미적분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다.
1686년
만유인력 이론을 완전히 정립한다: 우주의 모든 물체는 서로를 끌어당기며, 동시에 끌어당겨진다.
1687년
국왕이 시드니 서섹스 칼리지에 가톨릭 베네딕토회 수도사 알반 프랜시스(Alban Francis)에게 국교회의 충성 서약 없이 석사 학위를 수여하라고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뉴턴 자신은 비밀리에 유니테리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상 영국 국교회에 대한 충성은 프랜시스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는 원칙적으로 대응했다. 결국 뉴턴과 다른 대표자들은 판사 제프리스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되고, 당시 부총장이었던 존 피첼(John Peachell)은 파면당하지만, 칼리지는 입장을 고수했고, 프랜시스에게학위는 수여되지 않았다. 그해 7월, 핼리의 적극적인 권유와 전적인 자비 부담 하에, 뉴턴은 자신의 역작 프린키피아를 출판한다. 이 책은 역학, 유체, 만유인력에 대한 결정적인 저술로, 출간 당시에는 영국 외부에서는 만유인력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뉴턴은 유럽 전역에서 당대 최고의 수학자이자 과학 사상가로 명성을 확립하게 된다.
1689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선출 국회의원(MP)으로 당선된다. 킹스 칼리지(Cambridge)의 교장직(provost)에 지원하지만, 여기서는 임명되지 않는다. 이 시기 뉴턴은 영국 지식계에서 일종의 슈퍼스타로 여겨지며, 그에게 헌신적인 젊은 추종자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이들 중 다수는 뉴턴의 자연철학뿐만 아니라 그의 비정통적 신학관까지 공유하게 된다. 이 무렵 혹은 조금 앞서,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 그리고 스위스 수학자 파티오 드 뒬리에(Fatio de Duillier)와 교류를 시작하는데, 특히 후자와의 관계는 뉴턴 생애에서 유일하다고 할 만한 친밀한 인간관계로 평가되기도 한다.
1690년
존 로크(John Locke)에게 ‘성서의 변질(corruptions of Scripture)’에 관한 장문의 편지 두 통과 보충 편지 한 통을 보낸다. 이 서신들에서 뉴턴은 자신의 반삼위일체적 확신을 명시적으로 밝힌다. 동시에 프린키피아의 개정 작업을 시작하며, 자신이 확신하는 바, 곧 진정한 자연철학(즉 뉴턴의 자연철학)은 기독교 이전의 여러 문명에 속한 지혜자들이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신화나 고대 신전과 유적들(예: 스톤헨지)의 은유적·상징적 구조에 담겨 전해졌다는 믿음—을 정교하게 발전시킨다. 그는 자신이 이룬 모든 발견이 실은 ‘고대의 지혜(prisca sapientia)’의 재발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1692년~1693년
수학자 리처드 벤틀리(Richard Bentley)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자연철학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종교의 방벽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한다. 또한 존 로크(John Locke)와는 연금술에 대해 교류한다. 로크는 로버트 보일(Robert Boyle)의 유고를 검토하는 위원 중 한 명으로, 그 가운데에서 발견한 연금술 조제법 두 가지를 뉴턴에게 보내준다.
1693년
케임브리지에서 자신과 인접한 방을 쓰자고 파티오(Fatio)에게 제안하지만, 이 계획은 실현되지 않는다. 약 7~8월경, 뉴턴은 신경쇠약을 겪는다. 9월,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로크(John Locke)에게 편지를 보내, “그대가 나를 여성들과 엮으려 했다고 착각했다”며 사과하고, “누군가 그대가 병약하다고 말했을 때 나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대답했다”고 고백한다. 한 달 뒤, 그는 “당시 편지를 쓸 때 2주 내내 하루 한 시간도 못 자고, 닷새 동안은 단 한숨도 못 잤다”고 해명한다. 연말쯤엔 다시 평정을 되찾는다. 이 사건 이후, 뉴턴은 파티오와 거의 혹은 완전히 교류를 끊는다. 둘 사이의 결별 사유는 지금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1694년
뉴턴은 달의 운동에 대한 자신의 중력 이론으로는 아직 만족스럽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플램스티드에게 관련 관측 자료를 제공해줄 것을 강하게 요구한다. 그러나 그는 플램스티드에게 이 주제에 대해 스스로 이론을 세우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더 나은 자료를 수집해 제공하는 데 집중하라고 말해 플램스티드의 심기를 크게 건드린다.
1696년
3월, 정체불명의 ‘연금술사’가 뉴턴을 찾아와, 모든 금속을 용해시킬 수 있는 ‘멘스트루움(menstruum)’이라 주장하는 물질을 전한다. 아마도 이 무렵 뉴턴은 『Praxis』라는 제목의, 자신이 쓴 (연금)화학 문헌 중 가장 방대한 에세이를 집필하나, 출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제 실험 수준의 연금술 연구는 이 시기를 전후로 중단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는 문헌 및 필사본 수집 위주로 연금술 활동이 전환된다. 3월 19/29 (O.S./N.S)일, 뉴턴은 왕립 조폐국(Warden of the Royal Mint)에 임명된다. 당시 조폐국은 런던탑 내에 있었으며, 뉴턴은 4월 20/30일에 케임브리지를 떠나 런던에 정착한다. 이 자리는 전통적으로 명목상의 관직으로 여겨졌으나, 뉴턴은 예외적으로 매우 적극적으로 업무에 임하며 내부의 부패와 비효율에 대해 단호한 정화 작업을 벌인다. 이 무렵, 정확히는 1700년 이전 어느 시점에, 이부누이 해나 스미스(Hannah Smith)의 딸인, 캐서린 바턴(Catherine Barton, 1679년생)이 뉴턴과 함께 런던 자택에서 살게 된다.
1699년
파티오(Fatio)는 미적분학 발견의 우선권이 뉴턴에게 있음을 주장하는 저작을 출간하고,
그 안에서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아이디어를 표절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뉴턴 본인은 『프린키피아』에서 라이프니츠 역시 최소한 일부 결과에 독립적으로 도달했음을 인정한 바 있으나, 이 책의 출간 이후에는 자신이 파티오의 출간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인한다.
1700년
뉴턴은 본인의 요청으로 조폐국장의 직책을 '감사관(Warden)'에서 '국장(Master)'으로 전환한다. 이는 명목상으로는 덜 권위 있는 자리지만, 실제로는 더 영향력 있고 수입도 많은 직위였다. 임명은 1699년 12월 25일/1700년 1월 4일에 이루어졌다 (이날은 뉴턴의 생일이다). 한편, 파티오의 비판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Acta Eruditorum에서 반응을 내놓았고, 이로 인해 뉴턴과 라이프니츠 사이에 점점 더 격렬하고 개인적인 논쟁이 촉발된다. 양측 모두 대개 제3자나 익명 출판의 형식을 통해 이 논쟁을 이어갔으며, 이 분쟁은 라이프니츠 사망 때까지(그리고 뉴턴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그들을 사로잡는 중심 사건으로 작용한다. 양측의 측근들이 의도적으로 갈등을 부추기면서, 논쟁은 다음의 양측 입장을 포함하게 된다: 1.라이프니츠의 ‘기적’ 및 ‘예정조화설(pre-established harmony)’에 대한 공격 → 이는 훗날 볼테르가 “현존 가능한 가장 좋은 세상에서 모든 것은 최선이다”라는 풍자로 조롱한 바 있다. 2. 뉴턴의 중력 이론에 대한 반발 → ‘작용하는 매개 없이 작동하는 힘’이라는 점이 형이상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받음.
1701년
다시 한 번 케임브리지 대학교 대표 하원의원(MP)으로 선출된다. 자신과 같은 유니테리언(Unitarian)이자 오랜 친구인 홉턴 헤인스(Hopton Haynes) 를 조폐국 검수관(weigher and teller) 으로 임명시킨다.그리고 12월, 약 5년 넘게 부재 중 상태로 맡아왔던 루카스 석좌교수직(Lucasian Chair) 에서 공식적으로 사임하고, 후임으로는 그의 후배이자 제자였던 윌리엄 휘스턴(William Whiston) 이 임명된다.
1702년
앤 여왕의 대관식 메달을 디자인한다.
1703년
왕립학회 (Royal Society) 회장으로 선출되며,이후 매년 재선을 통해 사망할 때까지 이 직위를 유지한다.
뉴턴의 프린키피아!/서울대 추천도서!/인문학이라는 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