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규 칼럼] 불평등의 구조를 다시 묻다: 공정에서 공의로
복권이 된 삶, 공정이 놓친 것
우리 사회에서 성공은 정말 개인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태어날 때 주어진 유전자, 부모의 자산과 교육환경, 성장한 지역, 우연히 만난 사람과 기회, 그리고 시대의 흐름까지 생각하면 개인의 성취에는 상당한 운과 구조적 조건이 개입합니다.
한 사회가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는 그 사회가 가장 자주 부르는 단어를 보면 드러난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공정을 말해 왔다. 입시에서, 채용에서, 승진에서, 부동산과 자산 시장에서 사람들은 공정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상한 점이 있다. 공정을 외치는 목소리는 커졌는데, 삶이 더 정의로워졌다고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규칙은 더 투명해졌지만, 결과는 더 불평등해졌다는 체감이 넓어지고 있다.
윤정구 이화여대 경영대학 교수의 "복권 사회의 정의" – '공정을 넘어 공의로'는 바로 이 역설에서 출발한다. 이 책은 개인의 노력과 제도적 절차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복권 사회’라는 개념으로 읽어낸다. 저자는 출발선 자체가 이미 다르고, 자산 시장에서의 우연한 승패가 삶 전체를 크게 바꾸는 사회에서는 공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공정이 규칙의 문제라면, 공의는 그 규칙이 공동체 전체의 지속 가능성에 부합하는지 묻는 기준이다.

복권 사회의 구조
이 책이 말하는 복권 사회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태어날 때 받은 조건, 즉 가정 배경과 자산, 교육 기회, 지역, 건강, 외모 같은 요소가 삶의 출발선을 좌우한다. 여기에 부동산, 주식, 코인 같은 자산 시장이 결합하면 노동의 성과보다 자산 보유 여부가 훨씬 큰 격차를 만든다. 이 구조에서는 성실하게 일하는 것만으로는 계층 이동이 어렵고, 반대로 우연한 자산 상승은 실력처럼 포장되기 쉽다. 결국 사람들은 노력보다 운의 비중이 큰 세계에서 서로의 성취를 오해하게 된다.
한국은행이 2026년 6월 발표한 가계 양극화 분석은 이런 현실을 뒷받침한다. 상위 10% 가구의 순자산 점유율은 2022년 43.0%에서 2025년 46.1%로 올라갔고, 순자산 지니계수도 2017년 0.584에서 2025년 0.625로 악화됐다. 동시에 순자산과 소득이 모두 하위 20%인 가구 가운데 20~30대 비중은 2020년 7.9%에서 2025년 15.2%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자산과 소득의 양극화가 동시에 진행되며, 청년층이 경제 구조 안에서 더 불리한 위치로 밀려나고 있다는 뜻이다.

공정의 한계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절차적 공정에 큰 기대를 걸어 왔다. 입시의 규칙을 손보고, 채용의 과정을 투명하게 만들고, 특혜를 줄이면 불평등이 완화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산이 핵심인 사회에서는 절차의 공정성이 곧바로 삶의 공정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출발선이 다르면 같은 규칙을 적용해도 결과는 같지 않다. 같은 레이스를 뛰게 해도 누군가는 이미 더 앞에서 시작하고, 누군가는 뒤에서 출발한다.
한국은행 보고서도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소득 지니계수는 2023년 0.323에서 2024년 0.325로 다시 반등했다. 한때 완화되던 소득 격차가 다시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더구나 상위 10% 자산 비중이 1%포인트 오르면 2년 뒤 총요소생산성이 0.16% 낮아진다는 분석까지 제시됐다. 불평등은 분배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성장의 기반까지 약화시킨다. 공정한 경쟁을 설계해도, 사회 전체의 구조가 기울어 있으면 그 경쟁은 다시 불평등을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청년의 선택
이 구조 속에서 청년층이 부동산보다 가상자산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2022년 587만 명이던 국내 가상자산 투자자는 2025년 1099만 명으로 늘었고, 보유금액도 17조 6천억 원에서 111조 7천억 원으로 확대됐다. 전체 투자자 가운데 2030세대 비중은 47.8%에 이르렀고, 상당수는 소액으로 시장에 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무분별한 투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동소득만으로는 자산 형성의 문턱을 넘기 어려운 세대가, 제한된 가능성이라도 붙잡기 위해 확률적 시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로 읽을 수 있다.
이 현상은 한국 사회의 기대 구조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일과 저축이 자산 형성의 주요 경로였다면, 지금은 자산 가격의 상승 여부가 삶의 경로를 좌우한다. 특히 부동산 가격이 이미 높은 수준에서 굳어버린 상황에서는 청년이 정직한 노동만으로 자산을 축적하기 어렵다. 그래서 일부는 부동산 대신 주식과 코인으로, 또 일부는 연금과 공적제도의 보호에 더 강하게 의존하려 한다. 이 선택은 개인의 성향 차이만이 아니라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결과다.
공의의 필요
이 책이 제안하는 공의는 공정의 반대말이 아니다. 오히려 공정이 다루지 못한 더 큰 질문을 던지는 개념이다. 공정이 “규칙이 지켜졌는가”를 묻는다면, 공의는 “그 규칙이 공동체 전체에 좋은가”를 묻는다. 현재 세대의 이해관계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삶까지 함께 고려하는 판단 기준이 바로 공의다. 그래서 공의는 단순한 도덕적 수사가 아니라 제도 설계의 언어에 가깝다. 자산의 대물림, 노동소득과 자본소득의 과도한 격차, AI 확산 이후의 일자리 재편 같은 문제를 다루려면, 절차의 정교함만으로는 부족하다.
최근 AI 확산이 소득 양극화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한국은행의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기술 변화는 생산성을 높일 수 있지만, 그 이익이 소수에게만 집중되면 사회 전체는 더 불안정해진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누가 더 공정하게 경쟁했는가를 따지는 데서 멈추지 않고, 경쟁의 결과가 사회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해치지 않는지 점검하는 일이다. 공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등장한다.
사회적 해법
복권 사회를 바꾸는 해법은 개인의 태도 교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첫째, 자산 형성의 기회를 노동소득과 분리된 운의 영역에서 다시 사회적으로 조정해야 한다. 둘째, 교육과 채용의 공정성 논의에 자산 격차와 세대 격차를 함께 넣어야 한다. 셋째, AI와 플랫폼 경제가 만들어낼 초과이익을 사회 전체가 공유할 장치를 고민해야 한다. 넷째, 부동산 중심 자산 구조를 완화하지 못하면 청년의 삶은 계속 복권형 선택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논의가 특정 세대의 불만을 대변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청년이 불리하면 중장년도 안전하지 않고, 자산이 극단적으로 집중되면 성장도 둔화된다. 실제로 상위 자산 비중이 올라갈수록 생산성이 낮아진다는 실증 결과는, 불평등이 결국 사회 전체의 효율을 깎아 먹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공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공의의 언어로 다시 설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론
한국 사회는 지금 공정을 포기할 때가 아니라, 공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할 때다. 절차는 중요하지만, 절차만으로는 출발선의 불평등과 자산의 집중, 세대 간 기회의 단절을 바로잡을 수 없다. 복권처럼 운이 크게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노력도, 실패도, 분노도 쉽게 왜곡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공정 구호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기준으로 사회를 다시 설계하는 공의의 감각이다.
이 책은 공정 담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한국 사회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절차의 투명성만이 아니라 결과의 지속 가능성이다. 공정이 경쟁의 출발을 정리하는 개념이라면, 공의는 그 경쟁이 사회 전체에 남기는 결과를 평가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이 책은 공정 이후의 사회를 상상하게 만드는 문제작이다.

조선규 | 칼럼니스트
35여 년간 교육과 기업 경영, 그리고 지역 사회 발전의 현장에서 사람과 함께 성장해왔다. “삶의 문제는 결국 사람의 문제”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교육을 통해 변화를 만들고, 기업을 통해 길을 열었으며, 현재는 사회 곳곳의 다양한 문제를 함께 풀어가며 더 따뜻하고 공정한 미래를 그려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