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39] 정수자의 “장엄한 꽃밭”
장엄한 꽃밭
정수자
1
오체투지 아니면 무릎이 해지도록
한 마리 벌레로 신을 향해 가는 길
버리는 허울만큼씩 허공에 꽃이 핀다
그 뒤를 오래 걸어 무화된 바람의 발
설산雪山을 넘는 건 사라지는 것뿐인지
경계가 아득할수록 노을꽃 장엄하다
2
저물 무렵 저자에도 장엄한 꽃이 핀다
집을 향해 포복하는 차들의 긴 행렬
저저이 강을 타넘는 누 떼인 양 뜨겁다
저리 힘껏 닫다 보면 경계가 꽃이건만
오래 두고 걸어도 못 닿은 집이 있어
또 하루 늪을 건넌다, 순례듯 답청踏靑이듯

위 시조는 제목부터 이미 하나의 세계관을 열어 둔다. 「장엄한 꽃밭」에서 ‘꽃밭’은 미적 대상이기 이전에 수행의 결과이며, ‘장엄함’은 화려함이 아니라 견딤과 통과의 형식으로 제시된다. 인간이 삶이라는 길 위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소멸과 경계를 통과하며, 다시 일상으로 귀환하는 존재론적 순례의 서사를 시조의 압축된 형식 속에 담아낸다.
1. 에서 화자는 “오체투지 아니면 무릎이 해지도록”이라는 극단적인 신체의 자세로 출발한다. 이는 종교적 수행의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삶 앞에서의 철저한 낮춤이다. 서서 걷는 인간이 아니라, 기어가고 닳아 없어지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제시된다. “한 마리 벌레로 신을 향해 가는 길”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존엄의 주체로 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벌레라는 가장 미미한 생명으로 자신을 환원함으로써, 신 앞에 도달하기보다 신을 향해 가는 ‘과정’ 자체를 존재의 방식으로 삼는다. 이때 꽃은 목표가 아니라 부산물이다. “버리는 허울만큼씩 허공에 꽃이 핀다”는 구절은, 꽃이란 성취가 아니라 비움의 양만큼 피어나는 것임을 말한다. 꽃은 소유가 아닌 흔적이며, 허공에 핀다는 점에서 붙잡을 수 없는 가치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무화된 바람의 발”, “설산을 넘는 건 사라지는 것뿐인지”라는 이미지들은 세계가 점점 실체를 잃고 추상화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길을 걷는 주체마저도 점차 희미해지며, 남는 것은 넘는 행위 자체와 사라짐의 감각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경계가 아득할수록 노을 꽃 장엄하다”고 말한다. 경계란 삶과 죽음, 도달과 미도달, 있음과 없음의 접경이다. 그 경계가 흐릿해질수록 세계는 오히려 가장 붉고 장엄한 빛을 띤다. 노을꽃은 하루의 끝에서 피는 꽃이며, 소멸 직전에 드러나는 가장 농밀한 아름다움이다.
2. 로 넘어오면 시선은 수행의 산중에서 일상의 저녁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장엄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저물 무렵 저자에도 장엄한 꽃이 핀다”에서 꽃은 더 이상 자연이나 초월의 이미지에만 머물지 않는다. 퇴근길의 도로, “집을 향해 포복하는 차들의 긴 행렬” 속에서도 장엄한 꽃은 핀다. 포복이라는 단어는 1수의 오체투지를 다시 호출하며, 일상 노동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수행임을 암시한다. “저저이 강을 타넘는 누 떼인 양 뜨겁다” 는 비유는, 개별 차량들이 하나의 생명 군락처럼 움직이며 하루의 체온을 그대로 안고 흐르는 장면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마지막 수에서 “경계가 꽃”이라는 인식은 더욱 분명해진다. 힘껏 닫는 문, 즉 하루를 마감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꽃이며, 완결이다. 그럼에도 “오래 두고 걸어도 못 닿은 집”은 여전히 남아 있다. 집은 물리적 귀가이면서도 궁극적 안식, 혹은 자기 자신일 수 있다. 인간은 매일 집으로 향하지만, 완전히 도착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또 하루 늪을 건넌다” 고 말한다. 늪은 반복되는 삶의 무게이며,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시간의 점성이다. 그러나 그 늪을 건너는 행위는 절망이 아니라 “순례듯 답청이듯” 이루어진다. 답청은 봄을 밟는 일, 새 생명의 기운을 확인하는 행위다. 결국 이 시에서 삶은 고행과 축제, 수행과 산책이 동시에 된다.
「장엄한 꽃밭」은 꽃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꽃은 고통의 반대편에 있지 않고, 고통이 비워지고 닳아간 자리에서 피어난다. 이 시조는 인간이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집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그 과정 하나하나를 이미 장엄한 꽃밭으로 살아내는 존재임을 조용히, 그러나 깊은 울림으로 증언한다.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