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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오탁번의 "굴비"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시 해설] 오탁번의 "굴비"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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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60]

굴비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벙어리장갑』(문학사상사, 2002)

 

굴비 

  [해설

 

  시인의 용기를 본받고 싶다

 

  우리 시에 부족한 것이 해학성이나 골계미 같은 것이다. 그런데 오탁번 시인의 시 가운데에는 미소를 머금게 하는 시가 아주 많다. 남자들끼리 모였을 때 음담패설을 즐겨 하는 이가 끼어 있으면 지루하지가 않다. 웃다 보면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는데, 그 사람의 얘기를 더 듣고 싶은 생각에 몇 개만 더 해달라고 조른다. 시간이 좀 흐른다. 그때는 그렇게 배를 잡고 웃었는데 그 얘기를 다른 이들 앞에서 하려고 하면 디테일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아 옮길 수가 없다.

 

  오탁번은 남들한테서 들은 음담패설이나 우스갯소리를 잊지 않고 있다가 시의 소재로 재활용한다. 주워들은 이야기를 아주 깔끔하게 한 편의 시로 재탄생시키는 것은 오탁번 시인만의 장기였다. 오탁번 시인의 이런 시는 도덕이나 윤리의 차원에서 따지는 것을 거부한다. 산골 아낙네의 남편에 대한 사랑이 중요한 것이지, 근엄함 같은 것은 지금 시대에도 어울리지는 않는다.

 

  이번 한 번은 봐줄 테니 앞으로는 다시 하지 말라는 남편의 경고가 있었는데 그 경고에 응한 것인가. 결과적으로는 응하지 않고 다시 몸을 주었다는 것인데, “앞으로는 안 했어요라는 말에 독자는 당연히 체위를 떠올릴 것이다. 아아, 들판에서 개처럼, 말처럼.

 

  오탁번의 장기가 바로 유머, 위트, 혹은 해학이었다. 아내의 부정(不貞)에 남편이 노발대발하지 않고 봐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금 두 사람이 뜨거운 밤을 보냈을 거라고 예상한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라는 결구를 보니 부부가 또다시 만리장성을 쌓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사랑이 없으면 안 될 사람들, 아내도 남편도 다 훌륭한 분이다.

 

  [오탁번 시인]

 

  1943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및 박사과정을 졸업(문학박사)했다.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철이와 아버지」,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처형의 땅」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동서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협상, 고산문학상, 김삿갓문학상, 목월문학상, 공초문학상, 유심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집 『손님』『우리 동네』『시집보내다』『알요강』 등을, 소설전집 『오탁번 소설』 1~6, 학술서 『한국현대시사의 대위적 구조』, 평론집 『현대문학산고』『헛똑똑이의 시 읽기』『현대시의 이해』, 산문집 『시인과 개똥참외』『오탁번 시화』『두루마리』 등이 있다. 2023214일에 작고하였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시와시학상편운상가톨릭문학상유심작품상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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