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호의 AI 인문학 14] 대한민국, 기준을 세우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
질서를 설계할 수 있는 힘, 기술 주권
팬데믹이 불러온 기술의 서사
기대와 현실의 간극
2020년 초,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며 세상은 급격히 멈춰섰다. 외출이 통제되면서 디지털 기술은 사회의 핵심 인프라로 떠올랐다. 비대면 플랫폼과 원격 협업 도구는 순식간에 일상 속으로 파고들었다. Zoom의 하루 이용자 수는 3억 명을 넘겼고, 마이크로소프트 Teams는 팬데믹 이전보다 6배 이상 성장세를 기록했다.
사회가 접촉을 멈추자, 디지털 기술은 곧 필수가 되었다.
2021년, 메타버스와 NFT, 암호화폐가 기술 서사의 중심에 섰다. 페이스북은 사명을 ‘메타’로 바꾸고, 메타버스 사업에 연간 약 100억 달러(13조 원 이상)를 투입하며, 주도권을 선점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NFT 시장은 비플의 디지털 작품이 6,930만 달러(약 785억 원)에 낙찰되며 광풍에 불을 붙였다. 그 열기는 게임으로 번졌다. 블록체인 기반 수익형 게임(P2E), '액시 인피니티(Axie Infinity)'에 일일 250만 명이 몰렸고, 일부 개발도상국에선 청소년들이 가족 생계를 돕는 사례까지 등장했다. 기대는 확신으로 번졌다. 시장은 디지털 세계가 현실을 대체할 것이라 믿었다.

2022년, 팬데믹이 진정되자 기술에 대한 몰입도 서서히 식었다. 그중에서도 메타버스는 가장 먼저 한계를 드러냈다. 아바타로 은행을 찾고, 가상 공간을 걷는 일엔 당위가 없었다. 쇼핑과 만남조차 휴대폰에서 탭 한 번이면 끝나는 일이었다.
NFT와 가상자산도 한계를 드러냈다. 그 시기 시장을 움직인 건 기술이 아니라 심리였다. '놓칠 수 없다'는 불안과 단기 수익에 대한 기대가 FOMO(Fear of Missing Out)를 부추겼고, 이 심리가 거품을 키웠다. 하지만 막상 사용해보니 기대만큼의 필요성과 설득력이 부족했고, 열광은 빠르게 식었다. 당시 시장을 움직인 것은 기술의 진전이라기보다, 미래에 대한 맹신과 기준의 혼선, 반복된 혁신이 불러온 초조함이었다.
2022년 말부터 아마존, 메타,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주요 빅테크 기업들이 앞다투어 수천에서 수만 명 규모의 감원에 나섰다. 나스닥 지수는 33퍼센트 하락했고,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넘는 기술 대기업들도 수천억 달러의 가치를 잃었다. 팬데믹 시기의 과잉 채용과 기술 낙관은 빠르게 무너졌다. 이른바 ‘테크 리세션(Tech Recession)’이었다.
이어서 기술주 버블 붕괴(Tech Bubble Burst)가 본격화되었다. 시장을 이끌던 초대형 종목들이 줄줄이 무너졌고, 미래를 선도할 것처럼 보였던 기술 낙관은 불과 2년 만에 식어버렸다. 거품이 걷히자, 남은 건 수익성 없는 서비스와 무력해진 신뢰뿐이었다.
침체 이후의 전환
생성형 AI가 다시 쓴 기술의 지형
2022년 11월, ChatGPT가 등장했다. 출시 하루 만에 가입자 100만 명을 기록했고, 두 달 만에 월간 이용자 수는 1억 명을 넘어섰다. 이는 최단 기간 신기록을 세운 틱톡보다 빠른 수치였다. 사용자, 자본, 정책이 동시에 반응한 이례적인 순간이었다.

침체돼 있던 기술 산업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OpenAI에 100억 달러를 추가 투자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구글·아마존·메타도 자체 모델 개발과 인력 확보에 박차를 가했다.
정부의 대응도 뒤따랐다. 미국, 유럽연합, 중국은 각각 규제 정비와 기술 투자에 착수했고, 한국과 일본 등 여러 나라들도 AI 중심의 예산과 인프라 정비에 나섰다. 관심과 자본, 정책이 다시 기술에 집중되면서, 산업과 정부 모두 생성형 AI를 핵심 전략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생성형 AI를 중심으로 기술 생태계는 새로운 활력을 되찾았다. 일부 산업에서는 빠르게 도입이 이루어졌고, 다양한 분야에서 그 가능성을 둘러싼 논의가 확산되었다.
기준을 세우는 힘, 미래를 선택하는 자격
기술이 설계하는 질서

생성형 AI의 부상 이후, 기술은 혁신의 수단을 넘어 국가 전략의 자산으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AI 경쟁은 산업을 넘어 안보와 외교의 영역으로 확장됐고, 기술은 국가 주권의 핵심이 되었다. 클라우드와 AI 인프라는 기술 질서를 설계하는 기반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특히 양자컴퓨터는 정보 해독과 연산 속도, 무기체계와 에너지 운용까지 아우르며 권력의 경계를 다시 그리는 기술로 부상했다. 일부 기업은 양자 연산 자원을 클라우드 형태로 개방했고, 그 사용 권한은 점차 지배력의 도구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기술을 먼저 가진 쪽이, 질서까지 앞서기 시작한 것이다.
기준을 가진 국가만이 새로운 질서를 설계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기술 수입국에 머물 것인지, 기술 질서를 설계할 것인지의 갈림길에 서 있다. 기술을 산업의 도구로만 인식하는 한, 미래 질서를 논의할 자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독립적인 전략과 기준이 없다면, 다른 누군가가 만든 규칙을 따라가야 할 수밖에 없다. 기술 주권은 기술을 보유했느냐가 아니라, 기술을 통해 어떤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기술의 역사에는 언제나 과열과 냉각이 반복되었다. 전자산업과 닷컴 버블, 스마트폰과 플랫폼의 폭발적 성장, 메타버스와 NFT, 그리고 AI 열풍까지. 기술은 늘 ‘다음 시대’를 약속하며 주목받았고, 많은 흐름은 중심에서 멀어지거나 조용히 자리를 바꾸었다. 그 가운데 기준이 된 기술이 있었고, 그 기준을 먼저 세운 국가와 기업이 다음 질서를 설계했다.
AI는 오프라인 인프라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실물 산업이며, 양자컴퓨터는 기존 체계를 뒤흔드는 비대칭 전략무기다. 이 둘은 기술 주권의 뿌리이자, 미래 질서를 설계할 수 있는 열쇠다. 대한민국이 그 기준을 세우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AI·인프라·양자기술을 균형 있게 확보하고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구조적 역량을 갖춰야 한다.
“기준을 가진 자만이 미래 질서를 설계할 수 있다. 그 기준을 스스로 세우는 힘이야말로,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다. 변화는 통제할 수 없지만, 대응할 힘은 만들 수 있다. 준비된 국가는 질서를 따를지, 이끌지를 선택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다시금 문명을 창조하는 국가로 나아가는 길 - 기준을 설계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시인, 칼럼니스트, IT AI 연구원 , KAN 전문기자
(주)데이터포털에서 빅데이터시각화팀장으로서 데이터 시각화와 AI 기술을 활용해 공공데이터의 효율적인 활용을 위한 연구에 주력하고 있음.
시인과 컬럼니스트로도 활동하며, 문학과 데이터 과학을 접목하여 AI 플랫폼 시대에 사는 우리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자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