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김정원의 "늙을수록 젊어지는 황혼의 말씀"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4]
늙을수록 젊어지는 황혼의 말씀
김정원
어머니는 여자보다 굳세다
그러나 어머니보다 더 굳센 어머니가 풀이다
어머니가 조단조단 말씀하신다
씩씩거리며 풀을 뽑는 어린 나에게
“애야, 내가 팔순이 넘도록 논밭에서 김매고 살면서 해볼 수 없는 것 한 가지가 풀이란다. 이 세상 모든 풀을 거덜 낼 듯이 너처럼 우악스럽게 뽑다간 풀이 너를 먼저 잡아먹는다. 사람이 풀과 싸워 이길 순 없지. 풀도 산목숨이고 먹여 살릴 자식이 있고 대를 이을 후손이 있으니 함부로 막 대하면 목숨 내놓고 대드는 어미 같지. 곡식 둘레 웃자라서 그늘을 드리우는 풀만 사부작사부작 걷어내고 나머지는 더 뻗지 않게 다스리면 된단다. 여름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면 억세고 사나운 풀도 제풀에 꺾여 사그라드니까. 얘야, 사는 게 그렇단다.”
소쩍, 소쩍, 소오쩍, 노총각 소쩍새가 애처롭게 울어대는 콩밭에서
오랫동안 같이 살다 보니 당신 허리 닮아가는, 구부러지고 닳은 호미를 놓고 일어선
어머니가 서쪽 하늘을 바라보신다
한가위 차례상에 오른 홍옥 같은 해가
장성 갈재뫼 꼭대기에 걸터앉아 석륫빛 노을로 수채화를 그리는
―합동시집 『잎이 나지 않는다고 나무가 아니라는』(작은숲, 2024)에서

<해설>
농사를 크게 짓든 작게 짓든 가장 힘든 일이 잡풀과의 싸움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제초’라고 쓰고 우리말로는 김을 맨다고 하는데 손을 베기도 다반사다. 이 시에 나오는 어머니는 풀을 우악스럽게 뽑은 아들에게 한참 타이른다. 풀도 생명체고 곡식도 생명체인 것, 잘 다스리는 방법이 있으니 그렇게 해보라고 한다. 아마도 농사를 지어본 이는, 짓고 있는 이는 이런 조언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지도 모르겠다. 도저히 안 되어 제초제를 썼다고. 다른 방법이 없노라고.
이 시의 등장하는 어머니는 자식을 키워본 사람이다. 산고를 겪은 뒤에 진통 끝에 아이를 낳아서 길러낸 분이다. 생명체의 하나하나의 고귀함을 알고 있는 것이다. 구부러지고 닳은 호미를 닮은 허리를 갖게 된 어머니는 성질 급한(?) 아들에게 조단조단, 자연의 섭리랄까 세상의 순리랄까 삶의 지혜를 몸으로 체득하였기에 조언을 해주는 것이다.
토인비가 쓴 책인가 어느 역사책에서 읽은 것인데 세계 역사상 여성이 전쟁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고 한다. 자식이 전장에 나가서 전사하는 일을 획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점 중 하나가 생명경시 사상이 아닌가 한다. 우리 각자가 한가위 차례상에 오른 홍옥 같은 대접을 받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홍옥 같은 해가/장성 갈재뫼 꼭대기에 걸터앉아 석륫빛 노을로 수채화를 그리는” 광경을 내게 보여주신 시인의 손을 잡아보고 싶다.
김정원 시인 약력
김정원 시인은 전남 담양 출생으로 영문학 박사다. 2006년 《애지》 신인문학상에 시가 당선되었고 2016년 《어린이문학》에 동시 5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했다. 시집 『꽃은 바람에 흔들리며 핀다』, 『줄탁』, 『거룩한 바보』, 『환대』, 『국수는 내가 살게』, 『마음에 새긴 비문』, 『아득한 집』, 『아심찬하게』와 동시집 『꽃길』, 『엄마, 아이스크림 데워주세요』를 간행했다. 수주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나무 앞에서의 기도』 『사람 사막』 등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