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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임의 시조 읽기 8】이현정의 "을의 기록"
문학/출판/인문
[ 강영임의 시조 읽기]

【강영임의 시조 읽기 8】이현정의 "을의 기록"

시인 강영임 기자
입력

 

을의 기록 / 이현정 사진: 강영임 기자
을의 기록 / 이현정 [사진: Chat GPT] 

을의 기록

 

이현정

 

1

염기서열이 다 밝혀진 생명체 초파리는

온갖 광선에 쏘여 유전자가 조작됩니다

본능도 통제됩니다 의지도 사라집니다

 

2

몸통이 짓이겨지고 마음이 잘려 나가도

어떻든 오늘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답니다

그것이 계약이니까요 나는 매양 무력합니다

 

3

존엄하게 살 권리도 죽을 수 있는 권리도

없는 자의 눈시울은 꼭 같이 붉습니다

빼곡히 하루 다 바쳐 을의 기록 새길 뿐

 

『지구를 돌리며 왔다』  (여우난골. 2025)

 


  갑과 을은 힘의 불균형이다.


  돈과 권력이 갑에게 몰려있고 심지어 평등해야 할 법과 법률 지원도 이용하기 쉬운 갑에게 더 유리하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며 미학이다. 아름다운 말이나 멋진 구절을 미학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산문과 달리 시는 언어가 갖는 힘이며 감정의 울림이다. 특히 시대를 반영하는 시조(時調)는 더 그렇다. 이현정 시인의 「을의 기록」은 하루를 꼬박 바치고, 생을 바쳐 기록하는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다. 시인은 실험실 초파리에서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본다.

 

  의료기술 발전이라는 명분 앞에 광선에 쏘이고 유전자가 조작된다.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더 힘센 이들에 의해 생이 좌지우지되는 시대다. 세상에는 갑보다 을이 훨씬 많다. 하지만 갑의 힘이, 갑의 기록이 항상 우위에 있다.

 

  소득분배가 점점 어려운 시대가 되고 있다. 사회와 갑이 소외된 자들을 충분히 배려한다면, 그 배려감은 오르고 내리고 때로는 머물면서 소중한 것들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좋다라는 말이 있다. 좋으면 그냥 좋아하면 되고 더 좋으면 참 좋다라고 하면 된다. 없는 자들의 눈시울이 붉지 않은 그런 날, 갑이 을을 볼모로 잡지 않는 그런 날, 을의 기록들이 기록되는 그런 날들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강영임시인, 코리아아트뉴스 문학전문기자
 
강영임시인

서귀포 강정에서 태어나 2022년 고산문학대상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시집 『시간은 한 생을 벗고도 오므린 꽃잎 같다』

 

[편집자주: "강영임의 시조 읽기" 코너는 매주 수요일 아침에 게재됩니다]

시인 강영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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