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해설] 성찬경의 "영령은 말한다"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50]
영령은 말한다
성찬경
검은 제복을 입은 겨레가 겨눈 담담탄이
내 가슴을 뚫은 지 얼마 안 돼서 나는
컴컴한 조국의 하늘을 이처럼 떠다닌다.
내 나이 열아홉, 너는 늙을 수 없는 어리고 여린 혼백.
무서운 명부(冥府)의 법을 어겨가며 저세상의 마음을 다하지 못한 것은
내 속에 맺힌 조국의 미련이 아직도 차돌처럼 단단하기 때문이다.
슬픔의 강산. 피부는 피부대로 내장은 내장대로, 그리고 뇌수마저도
고비를 넘어서 썩어만 가는 화려한 강산.
숱한 도당, 얄미운 정객, 뭇 잡놈, 탐관오리들이
나라를 도맡아 요리한답시고 입으로 행동하고 주먹으로 말을 하고,
그럴 수가 있었을까. 백일하에 내건 불의의 간판.
바닥에 깔린 소복한 사슴들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더러는 신음하고 더러는 꿈틀거리고.
아아. 달리 있었으랴, 조국의 방부제가, 그날 강산을 흠뻑 적신
붉은, 어린 피밖에 조국의 정화제가 달리 있었으랴.
어머님은 내가 죽는 것보다는 딴 어떤 꽃다운 목숨이 죽어주기를,
아니 그보다도 차라리 조국이 송두리째 썩어서 결딴나 버리기를 바라셨거늘.
허나 내 곁에 비겁은 없었다. 나의 순수한 신경이 가리키는 대로
난 알몸으로 총구를 향해서 돌진했다.
분노의 화염. 맘모스처럼 거대한 봉화여.
목 맨 절규. 평화의 칼날. 오오. 몇 해 만의 후련한 토사.
어쩔 수 없이 위대한 스스로의 모습에 도취되어 트로이의 영웅처럼
나는 미소하며 푸른 하늘을 끝으로 크게 호흡했다.
기쁨이여. 선혈의 보람 있는 낭비여. 이제 별이 반짝일 조국.
그러나 다신 밟을 수 없는 조국. 결별을 영원히 견딤이여.
우리를 위해서 허울 좋은 기념비를 세우지 말라.
두 갈래 소리 내며 흉한 자세로 울부짖질 말라.
그 대신 참다운 기념비를 찾아다오.
길이 이어갈 참으로 보람 있는 기념비를.
이윽고 바람처럼 스러질 우리.
무서운 이곳의 법을 어겨가며
상기 저세상의 생각을 다 하지 못하고 있음은
그 슬픈 강산, 화려한 강산에 대한 숱한 한이
내 속에 아직도 차돌처럼 단단히 맺혀있기 때문이다.
―『사상계』(1960년 6월호)

[해설]
그해 4월 19일에 혁명이 있었다
오늘은 4ㆍ19혁명 65주년이 되는 날이다. 『사상계』 1960년 6월호는 특별히 표지에 ‘민중의 승리 기념호’라고 제호를 따로 붙이고 화보 ‘피의 일요일’을 실었다. 그리고 박두진의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와 김춘수의 「이제야 들었다. 그대들 음성을」, 신동문의 「아! 신화같이 다비데群들」, 그리고 성찬경의 이 시를 실었다. 혁명의 감격이 절절히 넘쳐나는 이 4편의 시는 읽으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특히 성찬경의 시는 화자를 그날 거리에서 숨져간 학생으로 함으로써 감동을 배가시킨다.
열아홉 살 학생은 썩어가고 있던 조국에 뿌려진 방부제였다. 트로이의 영웅처럼 미소하며 푸른 하늘을 끝으로 크게 호흡했다는 것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는 뜻이다. 죽은 학생의 넋은 당부한다. 우리를 위해서 허울 좋은 기념비를 세우지 말라고. 길이 이어갈 참으로 보람 있는 기념비를 찾아 달라고. 그런데 65년이 지난 지금 이 땅에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행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4ㆍ19혁명은 어떻게 해서 일어났던 것일까? 제1공화국 정권의 부정부패와 85세에 이른 이승만 대통령의 재집권에 대한 욕심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3ㆍ15부정선거에 대한 마산 시민들의 규탄 데모가 있었고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의 시체 발견(4. 11)이 불을 붙였다. 최루탄이 눈에 박힌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던 것이다. 4월 18일에 있었던 고려대생들의 평화적인 시위를 가로막은 반공청년단 종로구단 소속 단원들은 이른바 정치깡패들이었다. 학생들을 곤봉과 자전거 체인 등으로 마구 때려 거리가 온통 피로 물들자 그 소식은 각 대학에 전해졌고, 다음날 서울 전역에서 학생들을 일제히 교문 밖으로 뛰쳐나가게 했다. 당시 시위대의 구호는 “불법선거 다시 하라!”였다. “불법폭정 바로잡아 민주구국 선봉 되자”고 외치며 평화적으로 시위하고 있던 시위대를 향해 이승만 정권의 앞잡이들은 무차별 사격 명령을 내렸다.
4ㆍ19혁명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끌어냈을 뿐 아니라 종래의 잘못된 정치제도와 불합리한 사회적 관습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웠으므로 역사의 한 장에 기록되어 있는 과거지사가 아니다. 민주화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기에 혁명의 의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당시 사망자 수는 186명이었고 6,000명이 부상을 당했다. 병상에서 앓다가 죽은 이도 여럿 있어 200명이 희생된 우리 역사상 최초의 성공한 혁명이었다. 의와 참을 실천한 학생들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
[성찬경 시인]
1930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보성중학(6년제)과 서울대 영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경복중학교 영어교사를 거쳐 성균관대 영문과 교수, 한국시인협회장, 가톨릭문인회장,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을 역임하였다. 1936년 《문학예술》에 시 「미열」 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고 1966년 첫 시집 『화형둔주곡』을 발간한 이래 『벌레소리 송』『거리가 우주를 장난감으로 만든다』『논 위를 달리는 두 대의 그림자 버스』 등 12권의 시집과 시선집 『육체의 눈 영혼의 눈』, 시론집 『밀핵시론』 등을 펴냈다. 구상, 박희진 시인과 더불어 공간 시낭독회를 30여 년 이끌었다. 한국시협상, 서울시문화상, 월탄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2013년에 작고하였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