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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69] 김삼환의 “첨부 서류”

시인 김강호 기자
입력
“인간 관계의 존재론적 진실을 세련되게 형상화한 현대 시조”

 첨부 서류

 

김삼환

  

중요한 말은 묶어 별지로 첨부하니

조용할 때 열어보고 답신을 보내줘요

가을날 맑은 하늘에 뭉게구름 모습으로

 

가슴이 떨릴 때만 연락하라 하셨으니

어제 오늘 한꺼번에 여러 장을 썼어요

물들어 붉은 노을에 낙엽 몇 잎 떨구며

 

때로는 의미 없이 주고받던 말을 모아

첨부한 옛날 얘긴 열지 말고 기다려요

환절기 옷을 꺼내듯 파일명을 바꿀 테니

   

첨부서류 _ 김삼환 시조시인

첨부 서류에 담긴 존재의 철학

 

김삼환의 시조 「첨부 서류」는 일상의 언어인 별지’, ‘답신’, ‘파일명같은 현대적 사물을 통해 인간 존재의 내면을 섬세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겉으로는 편지를 주고받는 상황을 노래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말과 침묵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존재 방식, 기억의 윤리, 그리고 기다림을 형상화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 시대의 소통을 현대 시조의 정서 속에 세련되게 녹여낸 점이 돋보인다.

 

첫 수의 중요한 말은 묶어 별지로 첨부하니 / 조용할 때 열어보고 답신을 보내줘요에서 중요한 말은 단순한 전달 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 깊숙이 접어 두었던 존재의 진실이며, 쉽게 발화될 수 없는 영혼의 문서이다. 화자는 그 말을 묶어둔다. 여기서 말은 마치 스스로 움직이려는 존재처럼 의인화된다. 함부로 세상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결박된 것이다. 또한 조용할 때 열어보라는 부탁은 단순한 시간의 선택이 아니라, 타인의 마음을 읽기 위해서는 내면의 소음이 먼저 가라앉아야 한다는 성찰로 읽힌다. 이어지는 가을날 맑은 하늘에 뭉게구름 모습으로라는 구절에서 뭉게구름은 순간적으로 피어올랐다가 흩어지는 감정의 형상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결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현상이다.

 

둘째 수에서는 감정의 떨림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가슴이 떨릴 때만 연락하라 하셨으니 / 어제 오늘 한꺼번에 여러 장을 썼어요에서 가슴은 단순한 신체 기관이 아니라 기억과 그리움이 거주하는 공간이 된다. 떨림은 존재가 타자와 만나고자 할 때 발생하는 가장 원초적인 진동이다. 화자는 하루하루의 시간을 분리하지 못하고 어제 오늘 한꺼번에써 내려간다. 이는 시간의 경계가 감정 앞에서 무너지는 경험을 보여 준다. 사랑이나 그리움 앞에서 인간은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 구절은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이어지는 물들어 붉은 노을에 낙엽 몇 잎 떨구며에서는 노을과 낙엽이 강렬하게 기능한다. 붉게 물든 노을은 생의 황혼, 혹은 한 감정이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마지막 순간이다. 잎이 떨어지는 모습은 관계 속에서 흘려보내야 하는 기억과 미련이며, 아름다움과 소멸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셋째 수의 때로는 의미 없이 주고받던 말을 모아 / 첨부한 옛날 얘긴 열지 말고 기다려요는 작품의 깊이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흔히 의미 있는 말만 기억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인간관계를 지탱하는 것은 오히려 무심히 오갔던 사소한 말들이다. 화자는 그 흩어진 말들을 모아둔다. 말들은 여기서 기억의 파편처럼 살아 움직이며, 인간의 삶이 거대한 사건보다 작은 언어의 축적 위에 세워져 있음을 암시한다. 특히 열지 말고 기다려요라는 구절은 매우 역설적이다. 보통 첨부된 문서는 열어보아야 하지만, 화자는 오히려 열지 말라고 말한다. 이는 모든 기억이 즉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담고 있다.
 

마지막의 환절기 옷을 꺼내듯 파일명을 바꿀 테니는 현대적 이미지이면서도 매우 시적인 결말이다. ‘파일명은 디지털 시대의 차가운 기호처럼 보이지만, 여기서는 기억의 옷을 갈아입는 행위로 변환된다. 계절이 바뀌면 사람은 옷을 바꾸듯이, 마음도 기억의 이름을 새롭게 부여하며 살아간다. 파일명은 고정된 데이터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의미가 변하는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이는 인간의 정체성 또한 하나의 완결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수정되고 덧입혀지는 서사임을 암시한다.


그래서 「첨부 서류」는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라, 침묵과 기다림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인간 관계의 존재론적 진실을 세련되게 형상화한 현대 시조라 할 수 있다.

김강호 시인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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