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출판/인문
시 /시조

[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48] 김강호의 “은목서”

시인 김강호 기자
입력
“인간의 고통과 희망을 함께 품은 존재”

 

 은목서

 

김강호

 

담 너머 뒤꿈치 들고 상강이 지나갈 무렵

둘레길 소복하도록 아린 향을 뿌리는

은목서 넌, 천국에서 외출 나온 꽃이었다

 

전장에서 밀려온 눈이 먼 아우성을

주술이듯 굴리는 네 안의 핏빛 울음

오늘도 곪아 터진 귀에 넘치도록 채웠다

 

지상의 혼란 끌고 하늘로 돌아가서

잔별로 반짝이며 기도하는 꽃자리

은목서 넌, 테레사의 미소만큼 고왔다

은목서 _ 김강호 시인 [이미지: 류유강 기자]

이 시조 「은목서 」를 쓸때 나는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처와 구원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질 무렵 담장 너머에서 은은하게 번져 오는 은목서의 향기는 단순한 식물의 향기가 아니라, 이 땅의 고통을 잠시 덮어 주는 보이지 않는 손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시의 첫머리에서 상강 무렵 담 너머로 뒤꿈치를 들고 지나가는 계절을 의인화하였다. 계절은 스스로 걷지 않지만, 나는 그것이 마치 사람처럼 발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지나가는 모습으로 상상했다. 그 순간 은목서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천국에서 잠시 외출 나온 존재로의 변모다. 이는 자연을 신성한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장치이자, 인간 세계에 잠시 내려온 위로의 형상이다. 꽃은 말하지 않지만 향기로 말을 건넨다. 이 향기는 보이지 않는 언어이며, 상처 입은 세계를 어루만지는 은밀한 위로다.

 

둘째 수에서 은목서는 더 이상 단순한 향기의 존재로 머물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현실의 폭력성과 시대의 상처를 끌어들였다. “전장에서 밀려온 눈이 먼 아우성이라는 구절은 실제 전쟁만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경쟁과 갈등, 상처와 분노가 뒤엉킨 세계의 소리를 상징한다. 눈먼 아우성은 방향을 잃은 인간의 욕망이며, 끝없이 반복되는 비극의 메아리다. 그 아우성이 은목서 안에서 주술이듯 굴리는 핏빛 울음으로 변한다. 여기서 은목서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다른 차원의 언어로 변환하는 매개자다. 핏빛 울음은 인간의 상처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치유하려는 주술적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그 울음이 곪아 터진 귀에 넘치도록 채워진다고 말했다. 귀가 곪았다는 표현은 이미 세상의 소음과 폭력에 너무 오래 노출된 인간의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은목서의 향기는 그 곪은 귀를 다시 채우며 새로운 감각을 열어 준다. 이는 고통을 덮어 버리는 위로가 아니라, 고통을 통과한 뒤에야 가능한 정화의 과정이다.

 

마지막 수에서 은목서는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 여기서 자연의 순환을 신성한 귀환의 서사로 바꾸었다. 지상의 혼란을 끌어안고 하늘로 올라가는 은목서는 인간 세계의 기도를 대신 짊어진 존재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하늘에서는 잔별로 반짝이며 기도하는 꽃자리가 된다. 이 장면은 꽃이 별로 변하는 상징적 변형이다. 땅에서 향기로 말하던 존재가 하늘에서는 빛으로 기도하는 존재가 된다. 이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신성의 세계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순환 속에 있다는 암시다.

마지막 구절에서 나는 은목서를 테레사의 미소만큼 고왔다고 말했다. 여기서 테레사는 인간의 사랑과 헌신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연민의 표상이다.

 

결국 이 시에서 은목서는 하나의 꽃이면서 동시에 인간 세계를 위로하기 위해 잠시 내려온 천상의 사자다. 향기는 말이 되지 못한 기도이며, 별빛은 하늘로 돌아간 기도의 형상이다. 나는 이 시를 통해 자연이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과 희망을 함께 품은 존재임을 말하고 싶었다.

김강호 시인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시인 김강호 기자
share-band
밴드
URL복사
#은목서#김강호시인#시조해설#코리아아트뉴스시조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