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시 해설] 나금숙의 "언니"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시 해설] 나금숙의 "언니"

이승하 시인
입력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41]

언니 
 

나금숙

 

언니

내 두 손 모아 밝은 빛을 가득 받아 올리오니 받으세요

사백 년 만에 만난 우리지요

왜 그러셨어요

사람을 사랑하지 말고

차라리 그냥 하늘이나 구름이나 나뭇잎을 사랑하셨다면

돌을 사랑하고 달빛을 아꼈더라면

애절한 언니 마음 그들은 알아주었겠지요

흘러넘치는 사랑과 시를

몰래 구부리고 앉아 쓰는 야윈 어깨가 눈에 선합니다

당신이 밟은 문 앞의 돌들이 모래가 되도록*

그이는 오시지 않았지요

언니가 불러들인

갈매기와 기러기로 해서

강은 넓어졌고 하늘은 길어졌어요*

그 큰 품을 쏟아놓을 대지를 찾느라

온몸에 시를 두르고 바다를 건너셨군요

이 괴이하고 아름다운 주검,

작은 몸에 깃들인 시혼을 깊은 동해도 삼키지 못했어요

언니

옥봉 언니

다시 오시면 이 땅 이 하늘을 끝없이 펼쳐드릴 테니

그 사모함 그 기상을 마음껏 쏟으세요

지금껏 우리도 뚫어내지 못한

사람이 만든 철벽 앞에

몇백 년 봄바람으로 부는

언니

옥봉 언니
 

** 옥봉의 시 구절 : 옥봉은 16세기 후반(조선 중기)의 여성 시인으로, 서녀로서 사랑하게 된 조원의 첩이 됐으나 시를 쓰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시를 쓴 죄로 내쳐져서 떠돌아다니다 죽음.

 

―『사과나무 아래서 그대는 나를 깨웠네』(천년의시작, 2024)

 

옥봉의 비와 묘 [ 사진 : 파주시청]

 [해설]
 
  애통해라 옥봉의 죽음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가면 옥봉의 시비가 서 있다. 시비 뒷면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다. 시비에 마침표와 문자표는 없다.

 

  이름은 이숙원(李淑媛), 호는 옥봉(玉峯)으로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다. 선조 때 옥천군수를 역임한 이봉의 딸이며 운강공(雲江公) 조원(趙瑗)의 측실이다. 우리 가문에 현존하는 『가림세고(嘉林世稿)』 부록에 옥봉의 시 32수가 수록되어 전해오고 있으며 현세에도 절창으로 평가받고 있는 시인이다. 운강공과 옥봉의 만남도 예사롭지 않지만 별리의 과정이 애처롭고 생몰연대 역시 불분명하여 죽음의 과정 또한 알 길이 없다. 다만 중국의 어느 바닷가에 시편(詩篇)을 몸에 감은 시신이 떠다녔다는 이야기만이 설화처럼 전해져 오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에 우리 후손들은 옥봉 할머님을 추모하고자 운강묘 아래 이 비를 세운다.

 

  상당히 세세하게 옥봉의 삶과 죽음을 시비에 적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왕족의 서녀였던 옥봉 이씨가 조선 선조 때 양반가에 측실로 들어갔다 쫓겨나 이후 행적이 묘연한 뒤 임진왜란 때 자신이 쓴 시를 기름칠해 수의 대신 몸에 칭칭 감은 채 중국 동해안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고 기록했다. 소문을 듣고 쓴 것이라 과장된 내용이다. 옥봉이 누명을 쓰고 잡혀간 백정 아내의 부탁으로 그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한시인 「위인송원(爲人訟寃)」를 써줬고, 이 시를 통해 백정을 구할 수 있었으나 아녀자가 조정의 일에 끼어들어 남의 귀와 눈을 번거롭게 했다는 명목으로 조원에게 원망을 사 그의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고 한다. 조정만이 쓴 『가림세고』 부록에 옥봉 이씨의 시 32수가 소개돼 있다. 옥봉은 기녀로 살아가다가 전란 때 죽었다.

 

  나금숙 시인은 400년 전의 여인을 불러내어 애타게 외쳐본다. 한글로 번역된 시를 보고 시에 매료되었고 비운에 간 그녀의 생이 애통했으리라. 남편에게 버림받은 뒤에 보고 싶어 했으나(한시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끝내 재회하지 못한 듯하다. 나 시인은 각주에서 시를 쓴 죄로쫓겨났다고 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더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시인은 그녀를 언니라고 부른다. 나이에 상관없이 선배시인이기에 언니라고 불렀을 것이다. 지난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동안 여성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20세기도 후반에 들어서서야 여성의 인권이 인정받게 되었다. 아니, 지금도 우리 사회가 여성과 남성이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된다. 나금숙 시인이 읽어본 옥봉의 시를 찾아본다.

 

  몽혼(夢魂)

 

  님이여, 요즈음은 어찌 지내시나요

  달이 창에 뜰 때면 제 설움 끝이 없네요

  만일 제 꿈이 다니는 자취 있다면

  님의 문 앞 돌길이 반은 모래 되었으리

  

  (김달진 번역, 『한국漢詩』 제3, 민음사)

 

  [나금숙 시인]

 

  전남 나주 출생. 200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그 나무 아래로』『레일라 바래다주기』『사과나무 아래서 그대는 나를 깨웠네』가 있음. 2002년 문예진흥기금, 2017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서울시 공무원 역임. 현재 현대시학회 회장, 《시인하우스》 부주간.

이승하 시인,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나무 앞에서의 기도』 『사람 사막』 등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email protected]
share-band
밴드
URL복사
#이승하#이승하시해설#이승하시인#나금숙시인#옥봉#이숙원#몽혼#언니